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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행복하세요

한결같이, 새로이

by 김민주

<항상 행복하세요>


1.
2025년 1월 8일 13시 50분경, 민주는 집에서 나왔다. 이번 주 들어 기온이 뚝 떨어졌다. 민주는 옷을 단단히 여미고 장갑을 꼈다. 장갑을 낀 미끄덩한 손으로 이어폰을 양쪽 귀에 꽂으면서 버스 정류장으로 향한다. 그녀는 매일 같은 버스 정류장에서 같은 시간에 같은 버스를 탄다. 오늘도 어플로 버스 시간을 확인하고, 도착까지 9분이 남은 것을 보며 집에서 나왔다. 집에서 버스 정류장까지는 1분. 가끔 한 발 차이로 버스를 놓치는 경험을 반복하고 나서야 조금은 서둘러 집에서 나오는 습관이 생겼다. 1분이 지나면서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민주는 잠깐 서성거리면서 전광판을 보다가 7분이 남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의자에 앉았다. 차게 식은 의자의 표면이 긴 패딩의 두툼한 솜을 뚫고 엉덩이마저 식히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멍하니 지나가는 차들을 보고 있을 때, 시야 안으로 누군가의 다리가 들어왔다. 그리고 곧이어 그이의 목소리가 이어폰 틈으로 흘러 들어오는 듯했다. 잘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들어 보니 빨간 장갑을 끼고, 마스크를 두 겹 쓰고 있는, 처음 보는 할머니가 민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민주는 한쪽 이어폰을 빼고서 네? 하고 되묻는다.


의자 차갑지요?


민주는 고개를 살짝 끄덕거리면서 네에, 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다시 이어폰을 낀다. 민주는 이런 상황이 정말 당황스럽다. 그도 그럴게, 원체 말주변도 없고 낯가림이 심한 민주가 낯선 이와 대화하는 일은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직 버스는 5분이나 남았다. 대뜸 의자가 차갑지 않냐고 물어오는 할머니라니. 버스를 기다리는 5분 내내 대뜸 말을 걸어올 것이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음악 소리 너머로 다시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따듯하게 잘 입었네.
네에, 오늘 춥다고 해서요.


그러면서 민주는 헤헤 웃었다. 그리고 다시 전광판을 본다. 어느새 남은 시간은 2분. 하지만 요즘 들어 통 전광판에 뜨는 숫자보다 버스가 늦게 들어온다는 것을 민주는 알고 있었다. 2분이라고 해놓고 5분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마스크를 껴야 덜 추워요.
그렇죠, 그렇네요. 얼굴이 가려져서. 그렇겠네요.


할머니는 다시 말을 걸어오고, 민주는 짧은 대답을 하는 것도 횡설수설했다. 할머니는 마스크를 끼지 않은 민주가 안타까운 듯이 마스크를 껴야 한다는 말을 두 번 더 반복했다. 헤헤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멍하니 도로를 쳐다본다. 어김없이 할머니는 다시 음악 소리 너머에서 무슨 말들을 건넨다. 하는 수 없이 이어폰 한쪽을 빼서 장갑 속에 쥐어두고 할머니를 향해 끄덕거렸다. 사실 모든 말을 다 알아듣지 못했지만 꼭 알아들은 것 마냥 고개만 끄덕거려 본 것이다. 민주가 핸드폰을 꺼내보면서 장갑을 한쪽 뺐을 때, 할머니가 민주의 손을 빤히 보면서 손도 예쁘네,라며 웃고 민주는 뭐라고 대응하면 좋을지 몰라 또 헤헤 웃는다.


2분이 왜 이렇게 길까?
요즘 좀 늦게 오더라고요.


2분이 길다고 생각하는 것은 민주도 마찬가지였다. 2분이 이렇게 길게 느껴진 적이 또 있었나. 애가 탔다. 간신히 짜낸 대답을 하면서 속으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항상 행복하세요.


드디어 버스가 눈에 보이기 시작할 때, 버스가 들어온다는 말과 함께 민주에게 건넨 말이었다. 할머니가 곧 헤어질 민주에게 하고 싶은 마지막 말은 항상 행복하란 말이었다. 민주는 끔뻑거리면서 감사하다고 대답했다. 그리곤 뭔지 모를 것이 속에서 들끓는 것을 느낀다. 버스는 아직 신호에 걸려 멀찍이 서 있었다. 민주는 잠시 버스를 보고 있다가, 마음을 먹은 듯이 할머니의 팔을 툭툭 건드려 본다.


내일 더 춥대요. 감기 조심하세요.


눈가에 주름을 만들면서 할머니가 환하게 웃는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이윽고 도착한 버스에 올라탄다. 차근차근 계단을 오르는 할머니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민주는 차례가 되었을 때, 할머니를 따라 성큼성큼 올라탔다.


2.
1985년 1월 8일 13시 50분경, 그녀는 미처 장갑을 챙겨 오지 못해 벌겋게 식은 손을 비비면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매번 같은 출근길에 오르는 그녀지만 항상 부랴부랴 나오는 탓에 무언가 하나씩 꼭 빼놓고 나오곤 했다. 어제는 목도리를 두고 나와 매서운 겨울바람에 몸을 덜덜 떨었고, 오늘은 목도리를 신경 써서 챙기면서 장갑을 두고 나온 것이다. 더군다나 오늘은 올 겨울 들어 가장 추울 것이라는 날이었다. 손을 비비적거리면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 때, 누군가 툭 손을 내밀었다.


아이고, 이렇게 추운 날 장갑도 안 끼고 나왔어?


손을 따라 고개를 들어 보니 연세가 지긋해 보이는 할머니가 서 있었다. 눈앞에서 손을 툭툭 흔들기에 그 아래에 손을 두니, 빨간 장갑을 쥐어 준다. 그녀는 당황하여 방방 뛰면서 그걸 다시 할머니 품으로 들이밀었다. 그러자 허허 웃으면서 다시 장갑을 두 손에 꼭 쥐어 준다.


나는 이제 집에 갈 거라 괜찮아. 따듯하게 끼고 다녀요.


그녀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장갑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동안 할머니는 그새 벌겋게 식은 손을 흔들면서 훌쩍 떠났다. 그녀는 손에 들린 빨간 것을 채 거절하지도, 제대로 받지도 못하고 벙하니 쥐고 있다가 버스에 올라탔다.


3.
2025년 1월 8일 13시 53분경, 그녀는 버스 정류장에서 찬 바람을 맞고 볼이 발갛게 식은 아이를 만난다. 꼬박 40년이 지나서야 빨간 장갑을 낀 손으로 그 아이의 어깨를 한 번 토닥이고, 인사를 하게 된다.


항상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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