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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나—너—그리고 너—- 2 (2025)

시대, 세대

by 김민주

너—나—너—그리고 너—- 2 (2025)


자퇴를 하려고 하는 이유가 있어, 민주야?


민주에게는 어린 사촌들이 여럿 있다. 그중 한 명이 고등학교에 막 입학했다. 더 어렸을 때는 민주의 목덜미에 엉겨 붙어서 업어달라 놀아달라 떼를 쓰던 것이 민주만큼 커서 반듯하게 교복을 입은 모습을 떠올리니 퍽 대견스럽게 여겨졌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녀석이 자퇴를 하고 싶어 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것이다. 민주는 처음으로 사촌동생의 연락처를 받아 전화를 걸었다. 통화연결음이 길어지는 동안 민주는 상담실에 붙들려 앉아 마주했던 선생님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떠올리고 있었다.


여보세요.


이윽고 전화가 연결됐다. 익숙하고도 낯선 목소리가 넘어온다. 그것을 듣고 민주가 차분하게 동생의 이름을 불러 본다. 응, 서현아, 민주 언니야. 지금 통화 돼? 그러니 서현이 조그맣게 으응, 하고 대답한다.


민주는 여전히 어떤 계단 위에 있다. 요즘엔 그리 큰 폭풍우가 몰아치는 일이 적다. 이제는 너무 익숙하게 잡고 있어, 어렴풋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던 밧줄을 매만져 본다. 처음과 다르게 표면이 반질반질하고 부드럽게 만져졌다. 그새 꽤 낡았구나, 생각하고 있을 때 밧줄을 통해 누군가의 떨림이 전해져 오는 것을 느낀다. 계단의 어디서 이렇게 떨고 있을까. 위일까, 아래일까. 민주는 자신이 떨고 있을 때 어떤 것으로부터 위로를 받았는지 생각해 본다. 어느 늦은 밤, 대뜸 찾아온 선배, 희미한 가로등 불빛, 살갑게 흔들리는 손, 어떤 말 한마디, 자신에게 던져준 밧줄 하나. “민주야,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두 잘 살았으면 좋겠어. 너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야.”


살갑게 흔들리는 손, 어떤 말, 밧줄.



민주가 핸드폰의 뒷면을 슬슬 쓸어본다. 거친 것 없이 매끈하게 손이 흘러 내려간다. 민주는 다른 말 없이 다시 동생의 이름을 불러 본다. 서현아.


그러면서 서현이의 이름이 자신의 이름과 얼마나 다른가 생각해 본다. 글자로 쓸 수 있다는 것, 누군가의 이름이라는 것, 부르면 뒤돌아보게 만드는 것, 자신의 것에 새겨놓는 것, 그런 것 말고 한 구석도 닮은 것이 없는 그 아이의 이름을 불러 본다. 서현아. 서현이는 몸을 파르르 떨면서 계단 위를 올려다본다. 멀리, 꽤 멀리서 민주의 목소리가 계단을 타고 내려온다. 그 소리가 아득하고 아득하여 얼마나 멀리서 들려오는 것인지 가늠하기가 어렵다.


살갑게 흔들리는 손, 어떤 말, 밧줄.

목덜미에 매달려 업어달라고 떼를 쓰는 어린아이.

민주야,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두 잘 살았으면 좋겠어. 너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야.


허공에 그런 말을 써본다. 서현아,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두 잘 살았으면 좋겠어. 너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야. 그리고 그건 나의 말과 나의 마음이 아니라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나의 말과 나의 마음은 어디에 있나 생각해 본다.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전화해 봤어. 그냥, 목덜미를 만져보다가 서현이가 매달려 있던 장면이 갑자기 떠올라서.

그래? 나는 잘 기억이 안 나. 너무 어렸을 땐가 봐.

응, 언니도 사실 잘 기억이 안 나. 서현이도 많이 커서 이제 업어주긴 힘들겠다.

응.

그렇지? 아무튼, 다음에 또 전화할게. 청주 가면 같이 밥 먹자.

알겠어.


통화를 마치고 핸드폰을 책상에 툭 내려놓는다. 싱겁게 끝난 대화를 동그랗게 말아 핸드폰 위에서 굴려 본다. 나의 말과 나의 마음은 서현이에게 밧줄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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