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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따로 (2025)

독립, 홀로서기

by 김미넌 Mar 14. 2025

<외따로>



*

 주먹을 꾸욱 쥐었다가 검지 손가락을 하나 펼쳐 본다. 검지 손가락을 감싸고 있었던 엄지 손가락이 슬쩍 들리고, 손등의 힘줄이 따라 움직이는 것을 본다. 민주는 그것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고 싶어서 애먼 손가락 하나를 계속 접었다 폈다 하고 있다. 왜 그것들을 보고 싶은지,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왜 알고 싶어 하는가는 아직 모르겠다. 그냥, 그냥이 아닐까?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다.   

 그러면서 손가락이 단 하나뿐이었으면 어땠을까, 아니면 단 두 개? 같은 의미 없는 상상을 하고 있다. 민주는 검지 손가락을 펼쳐 보는 것에 이어 이번에는 엄지와 검지를 함께 펼쳐본다. 손가락을 몇 개 가질 수 있는지 고를 수 있다면 어떤 선택을 할까. 태초에 선택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 상태로 이 세상이 태어났다면 모두가 제각각 다른 개수의 손가락을 가지고 있었을까? 선택은 어떻게 할 수 있지? 엄마의 뱃속에서 세포분열을 하면서 세상을 향해서 “저는 손가락 열 개 가지고 태어날래요.”라고 말하면 열 개가 생기게 될까? 말을 배우기 전이니까 그건 힘들지도 모른다. 그림을 가지고 선택지를 보여주지 않을까. 그러면 아기가 뇌파나 텔레파시 같은 것으로 '열 개가 그려진 이미지'를 고르는 것이다. 고르는 게 뭔지는 알까? 민주는 끝없는 상상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손가락은 어느덧 늘어 중지 손가락까지 세 손가락이 접혔다 펼쳐졌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민주는 손가락을 반복적으로 움직이면서 방 안을 둘러본다. 의자를 하나, 둘, 셋, 하며 세어 보다가 멍하니 가장 멀리 있는 의자로 시선을 옮긴다. 이 방에 열 개의 의자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낸다. 하나씩 일부러 세어볼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면서 동시에 그래도 일부러 세어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하나. 둘. 셋. 그리고 소리를 내어 넷. 다섯. 빈 방 안에 목소리가 울린다. 여섯. 일곱. 여덟. 민주의 목소리만 울린다. 아홉. 간혹 밖에서 철근 같은 것이 부딪히는 소리나 벽에 붙어 있는 히터의 날개가 까드득거리는 소리가 목소리 사이에 섞여 들어간다. 열. 오토바이의 엔진 소리가 지나가며 민주는 잠깐 움츠렸다가 마지막 열 번째의 의자를 가리킨다. 


 두 개의 테이블이 이어져 있다. 그 틈에 열 개의 의자가 각각의 틈을 가지며 줄지어 있다. 열 개의 의자 중 단 한 개에 단 한 명의 사람이 앉았다. 왼쪽 벽면을 따라 검은색 선반이, 오른쪽 벽면을 따라 키가 작은 선반이 놓여 있다. 선반의 층마다 한 개, 혹은 두 개, 네 개나 다섯 개의 소품들이 자리하고 있다. 꼬불꼬불 테이블 위로 올라온 멀티탭, 그것을 따라 반대로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저 멀리 구석진 자리에 스피커나 히터, 키가 큰 조명이 아무도 없는 벽을 비추고 있다. 민주는 테이블 하나부터 의자, 소품들을 하나씩 세어보기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아무도 없는 곳을 비추고 있는 불빛을 바라본다.


 “아무도 없다.”


 민주가 소리 내어 말한다. 이어서 또 민주가 말한다.


 “벽이 있다.”


 그리고 다시 말한다.


 “아무도 없어.”



*

 민주는 테이블 위에 올라가 서핑 보드를 탄다. 테이블은 파도가 치지 않는 바다이다. 그녀는 한 번도 서핑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모양새가 그럴싸하게 보이지 않을 것을 우려했으나 누구도 그녀가 서핑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어떻게 보였을지는 끝내 알 수 없게 된다. 바다와 다르게 파랗지 않고, 파도도 일지 않았지만 민주는 겁이 난다. 접었다 펼쳤다를 반복하던 손가락들은 어느새 모여들어 주먹을 만들었다. 꽉 쥔 주먹이 움찔거린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인지, 힘을 주어 떨리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민주는 발바닥으로 평평하고 흔들리지 않는 테이블의 상판을 느낀다. 네 개의 다리, 그리고 그 사이를 지지해 주는 각목들이 연결되어 있다. 그것을 민주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서핑을 하다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지 않는 한, 눈으로 그걸 확인할 수는 없다. 주먹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다. 테이블을 누르고 있는 발바닥이 미묘하게 흔들리는 것을 느낀다. 파도가 치지 않는 바다에 파도가 친다. 휘몰아친다. 민주와 그녀가 올라타 있던 서핑 보드가 파도에 삼켜진다.   

 빈 방 안. 아무도 없는 모서리를 비추고 있는 키가 큰 조명 하나와, 주황빛으로 물든 벽면. 유난히 컴컴한 반대쪽 모서리와 빛이 들 듯 말 듯한 테이블 아래. 아무도 없는 가운데 단 한 명이 온몸을 떨며 뒹구는 그 빈 방.



*

 "아무도 없어."



*

 “매달림의 연속인 것은 아니었을까?”  

 “그들이 나한테 매달리고, 내가 너한테 매달리고.”  

 “오늘은 누구한테 매달릴지 고민이 되는군.”


 민주는 빈 방에서 글을 쓰고 있다. 그때 누군가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내왔다. 민주는 빈 방에서 누군가와 얘기를 한다. 구석의 조명은 여전히 빈 벽을 향해 서 있다. 허연 벽이 주황빛으로 물든다. 저것은 분명 하얀 벽이었는데, 민주의 눈에는 주황색으로만 보인다. 아직 오후 두 시인 것에 비해 이 방이 너무 컴컴하단 생각을 한다. 컴컴한 와중에 홀로 빛나고 있는 조명 혹은 조명을 받은 벽면이 너무 밝다는 생각을 한다.


  

*

 “아무도 없어.”


   

*

 오후 두 시. 그리고 5분이 지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의자 중 몇 개에 사람들이 앉을 것을 상상한다. 빈자리에 누군가를 앉혀두려고 보니 의자가 테이블 가까이에 틈 없이 붙어 있다. 누군가 그 의자를 당겨 앉기 전까지 민주는 아무도 없고 아무도 앉지 못하는 의자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

 민주가 나간다. 빈 방은 비로소 빈 방이 된다. 전원이 꺼진 조명은 여전히 벽을 보고 있지만 벽은 더 이상 빛나지 않는다. 민주는 빈 방을 상상한다. 그야말로 어둡고, 그야말로 아무도 없는 빈 방을 머릿속에 그리며 걷는다. 문득 자신이 언젠가부터 손을 관찰하기를 그만뒀다는 것을 알아챈다. 언제부터 그만뒀지? 서핑을 할 때였나? 아니면 그전? 의자를 셀 때였나? 민주는 더 이상 손가락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왜 그걸 궁금해하는지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꿈지럭꿈지럭 손가락을 다시 움직인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제각각 어디론가 움직이고 있었다. 상상 속 민주는 아무도 없는 비어 있는 방에서 홀로 서핑을 한다. 엄지, 그리고 검지, 민주는 길가의 사람들을 보며 손가락을 하나씩 펴기 시작한다. 하나. 둘. 방은 비어 있다. 셋. 넷. 다섯. 민주는 빈 방을 본다. 여섯. 일곱. 여덟. 민주가 빈 테이블 위에 올라선다. 아홉. 그리고 열 손가락이 모두 펼쳐진다. 테이블 위로 민주의 손바닥이 수평하게 흔들거린다. 민주가 작게 중얼거린다. 


 “아무도 없네.”


 그리고 누구도 그 소리를 듣지 못 한 채 제각각 어디론가 흩어져 나간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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