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우리
<우리의 우리>
-
우리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엉금, 엉금, 천천히 작업대 앞으로 기어갔다. 지난밤늦게까지 꿈지럭꿈지럭 만들던 작은 팔다리와 몸통 따위가 작업대 위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우리가 의자를 끌어당긴다. 작업대와 의자 사이가 이만큼 벌어지고, 우리가 그 사이로 다리를 밀어 넣으려고 하다 엉거주춤하게 멈춰 선다. 속이 메스꺼워 금방이라도 뭔가를 토해버릴 것 같다. 인간의 팔다리를 닮은 것들이 뒹구는 틈에 소주병이 엉거주춤 서있다. 우리는 그 매끈한 소주병의 표면을 눈으로 훑는다. 그리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
우리, 헤어지자.
우리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저 사람이 말하는 우리가 자신의 이름을 부른 걸까, 그와 나를 합쳐 부른 이름인 걸까. 그런 생각에 빠져서 그의 매끈한 눈동자를 멀뚱히 쳐다보고 있었다. 몇 번인가 눈꺼풀이 닫혔다 열리면서 눈동자가 사라졌다가 다시 나오길 반복했다.
우리야.
이번엔 확실하게 우리를 불렀다. 우리는 그의 눈동자 뒷면으로 멀어져 가던 시선을 다시 붙잡아 눈동자 앞으로 데려왔다. "응." 우리가 대답하자 그가 다시 말한다. "우리 헤어지자고. " 우리는 직감적으로 이번에는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우리'를 말한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응. " 그녀가 대답한다. 그는 우리와 '우리'를 두고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지내, 우리.
응.
그는 우리 앞에 '우리'를 내려놓는다. 그가 차분한 걸음으로 카페 밖으로 나갔다. 우리는 유리문 너머로 멀어지는 그의 걸음을 따라 눈을 옮기다가, 그가 사라지자 눈이 둘 곳이 없어 저 멀리 유리문 너머, 그 앞의 보도블록 너머, 그 속에 있을 흙바닥이나, 그 안 깊숙한 곳에 있다는 지구의 핵 같은 것을 본다. 하지만 지구의 핵 같은 것은 절대로 본 적이 없어 교과서에 실려 있던 그림 따위를 눈동자 속에서 굴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우리의 눈동자 속에서 책장이 스륵 넘어간다. 지구를 수박처럼 파낸 그림을 한 장, 두 장, 넘기면서 잘 기억나지 않는 지식들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그게 열몇 장 쌓였을 때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그녀는 그를 멀뚱히 바라보곤 했다. 살면서 수없이 많이 들어본 자신의 이름이었지만, 그가 부를 때엔 왠지 낯설게 들리곤 해다. 그래서 우리는 그때마다 자기를 부른 것인지 '우리'를 말하는 것인지 헷갈렸다. 그의 의중을 헤아리려고 우리는 그의 눈동자를 파고들어 가곤 했다. 하지만 눈동자 안에는 그의 마음이 없다. 우리는 텅 비거나 우리가 알 수 없는 것들로 꽉 찬 눈동자 속을 두더지처럼 떠돌다가 "우리야. "하고 부르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눈동자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
결국 속을 한 번 게워내고 돌아온 우리가 배를 쓰다듬으면서 작업대 앞에 앉는다. 우리는 점토를 꾸물꾸물 만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손바닥 안에서 점토를 굴려보면서 지구 같기도 하고, 누군가의 눈동자 같기도 한 것을 더 동그랗고, 더 동그랗게 다듬어본다. 동그란 것 위에 동그란 홈을 낸다. 그 위에 홍채가 될 작은 동그라미를 올리고, 동공이 될 더 작은 동그라미를 올린다.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눈 한 알이 우리를 쳐다본다.
-
다시 카페 안으로 돌아온 우리의 눈은 옆 테이블과 카페의 벽면 같은 것을 따라 두리번거리고 있다. 그러다가 그녀 앞의 테이블로 시선을 옮겼다. 마시다 만 아메리카노 두 잔. 하나는 우리의 것이고, 하나는 우리를 두고 간 남자의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우리'가 남겨져 있었다.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아 '우리'를 보기 위해서 테이블 위를 살펴보다 보면 자꾸 시선이 테이블 아래까지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우리는 테이블 위를 한 번 쓸어본다. 우리가 '우리'를 만진다. 그러나 없어진 '우리'는 만져지지 않았다.
-
작업대에 앉아 소주를 들이마시면서 우리는 자꾸 테이블 위를 쓸어봤다. 만져지는 것은 테이블일까, 우리일까, 그런 생각을 하다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우리는 허겁지겁 점토를 꺼내와서 팔다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
우리가 만든 '우리'는 우리와 꼭 닮았다. 우리의 팔다리, 우리의 얼굴, 우리의 눈. 우리가 만든 '우리'는 '나'라고 간단하게 제목을 지은 것처럼 우리이기도 하면서, '우리'이기도 했다. 이제 우리는 사라진 '우리'를 만지지 못하는 대신, 우리가 만든 '우리'를 만져본다. 굳은 점토의 단단함이 손가락 끝에 느껴졌다. 우리는 '나'를 보면서 "우리야. "하고 소리를 내어 이름을 불러본다.
우리야.
우리도 아니고, 우리도 아니고, 우리도 아니고, 우리도 아닌 점토 덩어리를 불러보면서 우리는 그게 자신을 부르는 소리라는 것을 단박에 눈치챘다. 잠깐의 적막 끝에 우리가 대답한다.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