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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2025)

듣는 사람, 말하는 사람

by 김민주

어차피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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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는 한 뼘 정도 되는 길이의 짧고 얇은 붓을 오른손에 잡고, 왼손으로는 오른손이 흔들리지 않게 손목을 슬쩍 받친 상태로 한껏 웅크리고 앉아 있다. 이젤에는 그녀의 몸집만 한 캔버스가 올려져 있었다. 온통 붉은색으로 칠해놓은 캔버스였다. 그리고 그녀는 그 캔버스 위에 빼곡하게 글자들을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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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화장의 ‘장‘을 쓰고는 고개를 들어 글자들을 올려다봤다. 이것들은 한 글자 혹은 두 글자, 많게는 네 글자 정도 되는 단어들이었다. 그들은 각각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함께 있게 되니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하는 것이 되어가고 있었다. 민주는 붓을 내려놓고 굽어 있던 등과 어깨를 한 번 활짝 펼쳐 본다. 어떤 의미도 가지지 못하게 되는 이 글자들을 왜 적고 있는지 그녀는 모른다. 단지 적고 싶을 뿐이었고 단지 적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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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지냈어요?

음, 잘 지낸 것 같아요.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민주는 매주 이 자리에 앉아서 같은 질문에 같은 대답을 했다. 이곳은 캠퍼스 구석 자리에 있는 학교 본관의 또 구석에 있는 상담센터로, 민주가 매주 이곳에 오게 된 것은 벌써 1년 반이 되었다. 이 질문이 익숙해질 만도 한데, 그녀는 여전히 어떻게 지냈냐는 질문에 어떻게 대답을 하면 좋을지 감이 오질 않았다. 그래서 매번 으음, 하면서 잘 지낸 것 같다는 대답을 하곤 했다. 어느 날은 그 이상 제대로 된 말을 하지 못하는 날도 있었고, 또 어느 날에는 일상적으로 보내는 하루들을, 또 어느 날에는 지난밤 꾸었던 꿈 얘기를 하곤 했다. 그러는 사이에 잘 지낸 날은 사실 손에 꼽았다. 민주는 생각보다 잘 지내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50분의 상담 시간을 마치고 운동장을 혼자 건너가면서, 민주는 매주 눈가를 슥슥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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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없는 단어들의 나열. 민주는 때로 그것들을 배치해 보고, 다시 한번 음절로 쪼개서 뒤섞기도 했다. 그러면 더더욱 그것들이 가지는 힘이 약해지곤 했다. 그녀는 그것들이 나약해지는 것을 보면서 알 수 없는 희열을, 혹은 더 알기 힘든 절망을, 그리고 정말 와닿지 않는 공허함을 느끼곤 했다. 민주의 머릿속에서 떠다니던 어떤 것이, 그녀의 손을 타고 밖으로 빠져나와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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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지냈어요?

그냥. 그냥. 그냥 잘 지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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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버스를 가득 메운 아무것도 아닌 것들 위에 민주가 눕는다. 그녀가 발버둥을 치는 것을 따라서 캔버스의 면이 눌리고, 뒤틀린다. 한참을 발버둥 치며 울던 그녀는 다시 이젤 위로 캔버스를 옮긴다. 그리고 민주는 제 손을 보면서 글자들 위에 손을 그려 넣기 시작한다. 손은 무언가를 뚫고 나와 울부짖는다. 울고 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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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는 몇 년 지난 그림을 떠올리면서, 어떤 의미도 가지지 못한 글자들을 함께 떠올렸다. 마음속을 돌고 돌면서 희미한 흠집을 내는 어떤 단어들을 숨기려고 그 글자들을 쓴다. 너무 시끄러운 마음은 입 안을 맴돌다가, 겁에 질린 나머지 입술을 잡아당겨 입속으로 밀어 넣는다. 겁에 질린 그 마음은 어떤 글자로도 닮게 쓸 수가 없어서 마음과 하나도 닮지 않은, 시끄럽기만 한 글자들을 써놓는다. 빨대다이어리베개아픔망너원단컵키보드도로삐삐손톱카드단추뜨개질게임정적마음갈림길이불화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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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지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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