칫솔, 달력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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칫솔=칫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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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력=달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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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칫솔과 달력이 함께 있다면? 달력과 칫솔이 함께 있는 것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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칫솔과 달력=칫솔과 달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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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칫솔과 달력에 대한 것이다. 당신은 칫솔과 달력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서 끈질기게 칫솔과 달력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아마 악착같이 칫솔, 달력과 가장 닮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찾으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어떻게든 엮고, 묶고, 닿게 만들어서 글처럼 보이게 만들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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칫솔은 달력이다.
달력은 칫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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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앞으로 칫솔을 달력이라고 하고, 달력을 칫솔이라고 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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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잠깐만요. 그러니까 칫솔이 달력이고, 달력이 칫솔이라는 거죠? 그냥 이름이 바뀐 걸까요?
편할 대로 생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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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는 칫솔을 꺼내 들었다. 치약을 짜고, 입에 넣는다. 어금니부터 문지르기 시작한다. 금방 거품이 입 안에 차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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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잠깐. 지금 그럼 달력으로 이를 닦고 있는 거예요?
글쎄요. 저야 모르죠. 뭘 생각하고 계시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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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에서 나온 민주는 책상 앞에 앉아 달력을 넘긴다. 2025년 3월 23일의 칸에 ‘쓰는 사람 128차 정기모임’이라는 글자를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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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칫솔로? 아니지, 칫솔에 쓰고 있다는 건가요?
그걸 왜 저한테 물으세요?
그럼 누구한테 물어요?
저의 대답이 중요한가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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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민주가 쓴 글을 읽고 있다. ‘칫솔’과 '달력', 그리고 이 글의 제목인 <사실>에 대해서 골몰한다. 당신은 민주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이 글을 쓴 것인지 알고 싶다. 어떻게든 답을 찾고 싶어 '칫솔'과 '달력', <사실>을 어떻게든 엮고, 묶고, 닿게 하려 한다.
하지만 민주의 <사실>은 어떻게든 당신의 <사실>이 될 것이다. 그럼 그것이 <사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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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바로 전 문장을 보고, 멀뚱멀뚱 앉아 있는 민주를 쳐다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을 본다.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우는 것 같기도 하다. 아무런 생각이 없는 것 같은데,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참지 못하고 민주를 부른다.
민주님, 무슨 생각하면서 썼는지 물어봐도 돼요?
민주는 동그란 눈으로 당신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인위적으로 입꼬리를 올린다. 여전히 민주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당신은 어떤 <사실>에 대해 들을 것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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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 민주는 끝내 대답을 하지 않는다. 안타깝지만, 당신은 이 글만 읽어서는 민주의 <사실>에 닿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당신의 <사실>이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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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사실>
<사실 번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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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민주의 <사실>에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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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게 뭔지도 모르겠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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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민주를 붙잡아 세워서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 거냐고 묻는다. 민주는 또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다가 천천히 입꼬리를 올린다. 이쯤 되니 민주가 답답하다. 민주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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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뭔지 아는 게 중요한가요? 그보다 저 좀 놔주세요.
민주는 헤헤 웃으면서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당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한다. 당신은 놀라면서 손에 힘을 뺀다. 민주가 빠져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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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집에 가면서 민주를 잡았던 손바닥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민주의 알 수 없는 표정을 떠올린다. 민주의 <사실>에 대해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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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1 : 민주의 <사실>을 포기한다.
당신 2 : 민주의 <사실>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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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 : 동그란 눈으로 당신 1/당신 2를 보면서 씨익 웃는다. 소리를 내지 않고, 입만 움직이며 '사실은 사실'이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