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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차차 (2025)

열쇠, 해결

by 김민주

<앗차차>


2018-03-24

새로 이사한 집은 4층짜리 건물로, 1층에는 마라탕 전문점이 있고 2층에는 아담한 베트남 음식점이 있다. 베트남 음식점의 입구 옆에 커다란 철문이 하나 있는데, 이 문을 열면 새로운 세상으로 갈 것만 같은 계단이 펼쳐졌다. 그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3층에 문이 하나, 4층에 문이 하나 있다. 3층에 사는 사람은 아직 만난 적이 없지만 중국에서 온 학생들이 산다는 것 같았다. 그리고 4층이 나와 동생이 함께 살 집이다.


이 집의 특이한 점이라면, 집에 들어가기 위해 문을 두 개 열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 중 3층으로 올라가는 철문은 꼭 열쇠로 열어야만 했고, 닫히면서 저절로 잠겼다. 현관문은 도어락인데 그 철문을 여는 것 때문에 열쇠를 꼭 들고 다녀야만 했다. 집주인에게 열쇠를 받고, 처음 며칠 간은 하나의 열쇠로 생활했다. 동생이 늦게 들어오는 날에는 나도 꼭 밖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만나서 함께 들어가고, 혹시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있으면 열쇠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찾아가서 열쇠를 받아와야 했다. 그러면 한 명이 집을 지키고 있다가 다른 한 명이 돌아올 때 3층까지 내려가서 문을 열어준다. 둘 다 열쇠 복사하는 것이 더 귀찮았던 것이다. 그런 생활을 얼마간 하다가, 이런 불편한 상황을 참지 못한 동생이 열쇠를 하나 더 복사해 왔고, 드디어 동생과 하나씩 나눠가지면서 그제야 편하게 집을 들락날락거릴 수 있었다.


그것과 동시에 나와 동생은 집에서 나가기 전에 몇 번씩 열쇠를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나는 매일 들고 다니는 가방에 카라비너와 늘어나는 케이블을 이용해서 열쇠를 매달아 놨고, 동생은 현관문 안쪽 신발장 위에 열쇠 자리를 만들어 놓았다.


2025-03-24

퇴근을 한 민주가 털레털레 골목 안으로 걸어 들어온다. 익숙하게 모퉁이를 돌아 대문을 연다. 창살로 된 대문은 높이가 낮아 머리를 꼭 숙이며 들어가야 했다. 처음 이곳으로 이사 오고 며칠동안 머리를 세차게 박고 다닌 후로는 의식하지 않아도 머리를 한껏 숙이게 되었다. 계단의 높이가 엉망진창이라 민주도 따라서 뒤뚱뒤뚱 계단을 오른다. 문 앞에서 숨을 한 번 크게 내쉰다. 손가락이 기억하는 대로 번호를 누른다. 띠리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민주가 들어간다. 문 안쪽에서 한동안 우당탕 하는 소리가 나다가 고요해졌다.


2018-03-24

내가 열쇠를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그 커다란 철문이 철컥 하고 닫히는 것을 들은 직후에 알았다. 손에는 밖에 내놓을 쓰레기 봉투를 들고 있었고, 분홍색 줄무늬가 있는 잠옷을 입고 있었다. 마음으로 열쇠!를 외치면서, 절망감이 휘몰아치는 것을 느꼈다. 허리와 허벅지를 더듬거렸다. 안타깝게도 이 잠옷에는 주머니가 하나도 없다. 고로 주머니 어딘가에 열쇠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얄팍한 기대도 절망감에 휩쓸려 갔고, 더 안타까운 것은 같은 이유로 핸드폰조차 챙기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물론 지갑 따위도 있을리가 없었다. 나는 일단 침착하기로 했다. 적어도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하자고 생각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래로 내려가 전봇대 옆에 쓰레기 봉투를 세워두는 것 뿐이라는 걸 알았다. 쓰레기 봉투를 내려 놓으며 분홍색 잠옷 소매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 와중에 쓰레기 봉투가 기우뚱거려 그것을 똑바르게 세워 놓으려고 이리저리 옮겨 봐야 했다. 그러고 난 후에야 나는 다시 나의 차림을 살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나는 모자를 쓰고 있었다. 일단 다시 계단을 따라 올라가서 철문 앞에 섰다. 모자를 슬쩍 벗어서 안을 휘적거려본다. 이미 한 눈에 보기에도 열쇠 따위가 있을 리 만무한데 나는 괜히 손을 넣어 휘적거려봐야 했다. 안쪽의 재봉선만 손톱에 틱틱 걸릴 뿐, 역시 열쇠는 없었다. 깊은 탄식을 하면서 자리에 주저 앉았다. 울고 싶었지만, 이런 일에 울기엔 너무 나이를 많이 먹어 그런지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전화기를 빌려 동생에게 전화를 해볼까 했지만, 동생의 번호가 도통 생각나질 않았다. 마침 베트남 음식점은 오늘 휴무인지 닫혀 있었다. 열려 있었더라면 잠깐 신세라도 질까 싶었겠지만, 내가 넉살 좋게 도움을 청할 만한 사람이 아닌 것을 감안하면 차라리 잘 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그리고 곧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문을 부술 수도 없고, 동생의 번호를 기억해내지 않는 이상 동생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다. 혹시 3층에 사는 사람들이 오가게 되면 들어갈 틈이 생길 것, 동생이 빨리 돌아올 것, 그걸 얌전히 기대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2025-03-24

민주가 손을 뻗어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작은 서랍 한 칸을 열어본다. 메모지 같은 것들을 뒤적거리면서 아래를 살핀다. 열쇠 하나가 좁은 틈에 누워 있다. 힘이 셀 것 같은 두툼한 열쇠였다. 민주가 그것을 손에 쥐어 본다. 기억의 저편에서 익숙하게 느꼈던 열쇠의 크기, 모양, 감촉을 손 안에 들여 온다. 지금의 집에 오기 전, 2년 쯤 살았던 집의 열쇠였다. 이사 오면서 반납하기로 했었는데, 웬일인지 민주에게 하나가 남아 있었다. 민주는 열쇠를 챙기지 않아 낭패감을 느꼈던 어느 날을 떠올리면서 열쇠를 더 세게 쥐었다.

민주는 편안한 게 좋다. 안주하면 어때? 내가 편하면 됐지. 왜 앞으로 나아가야 하지? 난 지금이 좋은데? 민주는 편안함이 주는 가치를 소중히 여긴다는 것을 앞세워 자신이 앞으로 나아갈 힘이 없음을 숨긴다. 나아갈 힘이 없을까봐 염려하여 자신이 편안하다는 착각을 기꺼이 진실처럼 받아들인다. 그건 민주가 어떤 철문을 열기 위해선 꼭 필요한 열쇠였을 것이다.


2018-03-24

정말 다행히 내가 2층 계단에 앉아 멍하니 시간을 보내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동생이 돌아 왔다. 누군가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려 황급히 일어나 벽에 붙었다. 동생의 얼굴을 보니 기쁜 마음이 일었다. 동생은 잠옷 차림에 모자를 삐뚜름하게 쓰고 있는 나를 보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감추지 못 했다. 나는 반가운 기색을 참지 못 하고 동생에게 매달렸다.


2025-03-24

하지만 그 열쇠는 어떤 철문만을 위한 열쇠였다. 민주는 커다란 철문을 떠올린다. 부드럽지만 묵직하게 열리는 문 너머로 계단이 이어져 있다. 그 문을 열 때만큼은 자신이 이 열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다행스럽게 여겨졌다. 아직 남은 계단이 있다 해도, 문을 열었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할 수 있었다.

민주는 서랍을 다시 열어 보고, 열쇠가 있던 자리를 눈으로 훑는다. 무엇을 기대하여 이제는 무엇도 열 수 없는 이 열쇠를 이곳에 남겨 놓았을까. 열쇠가 오랫동안 이 서랍에 있었다는 것마저 이 열쇠가 이제 어디에도 쓰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할 테다. 민주는 딱 열쇠가 들어갈 만큼 남은 빈자리를 빤히 바라본다.


2025-03-25

서랍을 직접 열어보지 않는 한, 민주가 그 열쇠를 그 자리에 다시 넣어 놨을지 혹은 버리거나 다른 자리에 놓았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민주는 지난 밤, 난생 처음 보는 문 앞에서 멀뚱히 그것을 바라보는 꿈을 꾸었다. 손에 가지고 있는 열쇠가 없으니 문을 열게 될 것이란 확신은 할 수 없다. 다만 민주가 ‘열쇠를 찾으러 가자’하며 발을 떼는 순간 잠에서 깨어난 걸로 보아, 퍽 희망적인 미래를 그려 보아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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