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처 없이
<정>
너는 정처가 없어 하루 속을 헤매다가, 문득 어떤 것도 정하여 두지 못하는 그 마음을 고백한다. 그것은 너의 어떤 줄기를 맞닥뜨리면서 멈춰 섰기 때문일까. 세상의 어떤 흐름이 있어 그것을 따라 잠시 쉬게 된 것일까. 멍하니 창밖의 불빛 무리를 바라본다. 오색빛의 줄조명이 각자의 리듬을 가지고 반짝이고 있다. 저런 것은 성탄절에나 반짝이는 것 아니었나. 12월이 되면 박스 안에 고이 묻어두었던 키가 큰 트리를 꺼내어 장식하던 기억이 떠오른다.
키가 큰 트리라고 했지만 지금 그 트리를 보아도 크다고 느꼈을까? 어린아이였던 내가 보기에는 확실히 키가 컸다. 언젠가 영화에서 본, 도심 한복판을 장식하고 있는 그런 트리처럼. 그 트리와 함께 박스 안에서 잠자고 있던 장식들을 하나씩 꺼낸다. 빨간색, 은색, 그도 아니면 금색인 동그란 구슬들을 순서 없이 가지에 매달았다. 그것이 끝나면서 줄조명을 트리에 둘렀다. 가지를 따라 층층이 자리 잡은 조명을 보면 마음이 점점 커져서 바닥에 발을 굴렀다. 불 켜보자, 불 켜보자, 엄마를 재촉하면 엄마는 아직 손에 남았던 조명줄을 급하게 나무에 올리면서 나를 타일렀다. 얼마간 기다림의 가치에 대해 배우면서, 발을 구르고 있으면 엄마가 보기 좋은 자리에 나무를 옮기고 콘센트를 꽂았다.
손톱 만한 빛이 줄줄이 반짝이는 때, 나는 너무 좋아서 펄쩍펄쩍 뛰어올랐다. 버튼을 눌러보면서, 다이얼을 돌려 보면서 조명의 속도를 조절해 보고 마음에 드는 것을 찾아낸다. 빠르고 가볍게 깜빡이던 것이 이윽고 차분하고 점잖게 점멸한다. 팔딱이면서 춤을 추던 나는 가만히 앉아서 차분하게 점잖은 생각들을 하곤 했다. 얌전하게 앉아서 조용히 점멸하고 있는 빛을 보고 있자면, 그 빛이 앞에 앉아 있는 내 다리에 조용히 닿는 것을 보고 있자면, 나와 함께 내 옆에서 말없이 빛을 바라보고 있는 엄마의 얼굴이 점멸하는 것을 보고 있자면, 나의 무엇이 점멸하며 마음에 담아둔 물아래로 가라앉고 있는 것을 느꼈다.
마음에는 물이 있어서 물보다 가벼운 것들은 하염없이 물 위를 떠다니며 수영을 한다. 그보다 무거운 것들, 혹은 물에 젖어 무거워진 것들은 물의 아래로 가라앉아 조용히 마음의 바닥을 지키게 된다. 가라앉은 것들은 내내 가라앉아 있느냐고? 마음을 뒤집으면 아마 물을 따라 쏟아져 나올 수도 있겠다. 굳이 그것들을 꺼내야겠다면.
너는 점멸하는 오색빛을 보면서 가라앉아 있는 것들을 떠올린다. 어느덧 해가 졌다. 시선을 옮겨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빈 컵을 바라본다. 컵을 뒤집어 남아 있던 몇 방울마저 털어내 본다. 어떤 것이 아래에 고여 있었을까, 어쩌면 그것들이 너의 정처를 앗아간 것은 아닐까. 몇 방울을 털어내면서, 컵의 바닥을 지키고 있던 것들이 함께 쏟아져 나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오늘의 정처가 거기 있었던 것이라고 허망한 추측을 해본다. 너는 그렇게 막연한 기대를 하고 있다.
어떤 하루는 반짝이는 것을 보는 중에 태연히 저물고, 너는 검어진 하늘 아래를 망연히 걷는다. 오늘은 어떤 것도 너의 멋대로 흘러가지 않았던 것은 오색빛과 쏟아진 커피 때문이라며. 그런 고백을 하면서 발걸음이 차츰 느려진다. 컵에는 다시 마음이 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