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 얼음
<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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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가 고장 난 지는 꽤 됐다. 서울에 올라오면서 중고로 산 115L 밖에 안 되는 작은 녀석으로, 벌써 8년 가까이 나와 함께 했다. 그 8년 간 이사를 3번 했다.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혼자 살기 시작해 그 작은 집에도 살림이 점점 늘더니, 서울에 올라와선 냉장고까지 옮겨가며 이사를 한 것이다. 작긴 해도 자기도 냉장고라고 이사할 때마다 챙겨 다니는 게 여간 지겨운 일이 아니었다. 이사 준비를 하면서 짐을 버리고 버려도 냉장고 때문에 차를 불러야 했다. 그 과정이 냉장고에게도 지겹고 고된 여정이었던 건지 4번째 집에 왔을 무렵부터 시들시들하기 시작했다. 어제저녁에 먹다 남겨 넣어 놓은 김밥이 오늘 아침에는 팍 상해 있었고, 엄마가 구태여 보내준 김치는 며칠이면 푹 쉬어 버렸다. 여름이 되면서 날이 더워지니 점점 더 심각해졌다. 냉장실도, 냉동실도 제 역할 중 어떤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옛날 조선시대에도 석빙고라는 게 있어 얼음을 보관하곤 했다던데, 우리 집엔 얼음 조각 한 톨도 제 몸을 건사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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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나는 뜨거운 얼음 같은 녀석이었다. 아니면 차가운 불꽃. 이상하게 늘 들들 타오르면서도, 얼음이기도 해서인지 제 열을 못 견뎌 쉽게 녹고 금방 끓어올랐다가 곧 꺼지고 다시 얼었다. 뜨거운 얼음이나 차가운 불꽃은 어떻게 생겼을까. 반은 활활 타는 불꽃이고, 반은 꽁꽁 언 얼음일까. 아니면 얼음을 감싸고 있는 불꽃? 혹은 그 반대? 글쎄,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생김새와 상관없이 두 성질 머리를 다 갖고 있으니 타면 뜨겁다고, 얼면 차갑다고 펄쩍펄쩍 난리를 쳐대야 했다. 엄살도 심해 조금만 한쪽으로 기울어도 끙끙 앓아누워 버렸다. 그 뜨겁고 차가운 바람에 때마다 아프니 나는 쉽게 울곤 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불꽃이 얼음을 줄줄 녹이고 있었던 것 아닐까. 한바탕 울고 나면 녹은 것이 모여 불꽃을 토닥이고, 기세가 죽은 불꽃 옆에서 얼음이 다시 커지는 것이다. 얼음이 다시 얼면, 불꽃도 활활 타고 또 때가 되면 아프고, 또 울고, 그런 구조인 것 아닐까.
누군가는 불꽃이기만 해서 무엇이든 활활 타오르게 만들었고, 누군가는 얼음이기만 해서 무엇이든 차분하게 제 형태를 잡을 수 있게 만들었다. 그와 다르게 나는 불꽃이기만, 얼음이기만 하지 못해 줄줄 울기만 하는 게 한심스러울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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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냉장고가 고장 났을 때는, 이까짓 거 없어도 그만이지 않나 생각했다. 나는 집에서 요리를 자주 해 먹는 편도 아니고, 냉장고에 이것저것 많이 넣어 놓지도 않았다. 새 냉장고를 골라서 사는 게 귀찮기도 하고, 필요성조차 절박하게 느끼지 못하니 고장 난 냉장고는 그대로 방치되었다. 냉장고가 참 작다고 생각했는데, 쓸모를 잃으니 방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게 꼴 보기가 싫었다. 쓸데없이 크기만 하다고.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제 역할을 잊는 듯하더니, 냉장고의 윗면에는 얼음이 얼었고, 문을 열면 뜨듯한 공기가 느긋하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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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뜨겁고 차가울 때마다 앓아누웠던 탓인지, 겁이 많은 탓인지 나의 열기도, 냉기도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땐 숨기기 급급했다. 다른 누군가가 뜨거워지는 것도, 차가워지는 것도 싫었다. 그러다가 나처럼 앓아누울까 봐, 앓아눕게 만든 것이 내가 되긴 싫어서. 게다가 확실히 뜨거울 자신도 없고, 확실히 차가울 자신도 없었다. 그 변덕스러운 장단에 괜히 누군가 휩쓸려 다치면, 그것을 잘 보듬어줄 자신도 없었다. 정말이지 비열하고 겁만 많아 누구에게든지 미적지근한 체를 하곤 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내가 뜨겁고도 차가운 인간이었기 때문에 혼자 있을 때면 언제나 쌓여있던 울음을 터뜨렸다. 어떤 여름날에, 고장 난 냉동실 밖으로 흐리멍덩하게 흘러 모인 물처럼 나의 시간 안에 울음이 저장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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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감기에 걸렸다. 열이 끓고 근육통이 심해 전기장판을 최고 온도로 높여 놓고 이불을 둘둘 싸매고 끙끙거렸다. 열이 나니 얼음이 녹기라도 하는지, 눈물이 그냥 흘러 콧잔등 위를 지나 베개가 축축해졌다. 앓다 앓다, 겨우 잠든 밤 사이에도 나는 편안하지 못하고, 지독한 악몽을 연달아 꾸었다. 괴로운 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나는 자꾸 눈을 떠버렸고, 밤새 몇 번이나 자다 깨다를 반복 했다. 몇 분이나 잤나 싶어 흐린 눈으로 슬쩍 시간을 확인하고, 오한에 덜덜 떨다가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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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에 악몽을 이어 꾸다가 새벽쯤 겨우 깨어나서, 물이나 한 잔 마시려고 엉금엉금 기어가 냉장고를 열었다. 물통을 쥐는데 냉기랄 게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안에 있던 반찬통을 몇 개 꺼내봤다. 김치가 쉬어버리는 일 같은 건 진작 일어난 일이었고, 몇 개 넣어 놨던 아이스크림을 들어보니 이미 봉지 안에서 물이 되어서 찰랑거렸다. 그제야 발바닥이 척척한 것이 느껴져 고개를 숙여 보니, 냉장고 앞으로 물이 흥건하게 고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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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끌어안고 있었다. 어떤 시간 안에는 냉장고가 충분히 고장 나는 중이었고, 김치가 삭아가고 있었고, 38.4도의 열과 오한에 어떤 이가 밤새 앓으며 악몽을 꾼다. 새삼스럽게 그것이 참 고되고 버거워서, 어쩌면 열에 못 이겨서, 어쩌면 냉장고가 고장 나서, 날이 밝을 때까지 울고 또 울었다. 뜨겁고도 차가운 울음이 115L쯤 모였다. 뜨겁고도 차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