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 훈련
_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나는 기본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이다. 이를테면, 마음이나 마음이나. 아니면 뭐, 마음 같은 것들. 같은 맥락으로 신도 믿을 수 없다. 존재 자체를 의심할 수밖에. 그렇다고 신이란 건 세상에 없다고,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존재를 부정해야 한다고 확언하지도 못한다. 마음 같은 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없는 것으로 치부되어 버린다면, 나는 아마 살지 못할 것이다. 보이지 않아도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이라도 있어야, 그래서 내가 그것을 찾게 될 것이라는 허황된 희망이라도 있어야 살 수 있지 않을까. 더군다나 오늘과 같이 보이지 않는 것들이 너무 많을 때엔 막연하고 허황한 것이라고 해도 없는 것보다 나을 것이다.
_
요즘 들어 부쩍 이 세계에 염증을 느끼고 있다. 아무도 모를 비밀을 하나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세계는 사실 만들어진 것이다. 이곳이 어떤 형태로 본래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는지는 나도 아직 알아내지 못했지만, 이곳이 본래의 세계와 분리되어 있을 건 명백하게 알고 있다.
꿈속에 비친 아찔한 햇살과 반짝이는 나뭇잎, 죽지 않는 나무와 끝없이 태어나는 버섯, 황홀한 꽃향기와 꽃잎을 감싸고 있는 포근한 솜털. 그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그곳에 있다. 그곳에 있을 것이 틀림없다. 그곳에 있어야만 한다.
_
마음이든 신이든 보이지 않는 것들은 비겁하다. 모습을 감추고, 있는 체를 하면서 막연하고 허황한 것들을 내게 심어둔다. 괜찮아, 괜찮을 거라고. 하지만 그 역시 허무맹랑하긴 마찬가지니 이 세계에서 더 이상 내가 믿을 것은 없다.
_
민주씨. 어떻게 지냈어요? 좋아 보이는데.
네. 좋아요.
동료 의사의 출산휴가가 급하게 앞당겨지면서 예상보다 빠르게 그녀의 환자들을 김원정이 맡아 진료하게 되었다. 그렇게 민주씨를 만나 벌써 4번째 진료였다. 민주씨는 오늘따라 싱글벙글 웃으면서 진료실에 들어왔다. 항상 조심스럽게 진료실 문을 열고 쭈뼛거리며 인사를 하고 먼저 말을 걸지 않으면 입을 떼지도 웃지도 않던 이가 환하게 웃으면서 들어오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좋아요, 라니. 그동안 어떻게 지냈느냐 물으면 항상 차분하고 조용하게 "그냥 뭐." 하고 말을 줄이던 그녀가 격양된 목소리로 "좋아요"라고 한 것이다.
너무 좋은 거예요. 여행은 오랜만에 다녀왔는데, 정말 좋더라고요. 한동안 이제 여행은 질렸어,라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모든 것이 신나고 즐거웠어요. 햇살이 아뜩하게 빛나고, 그걸 받은 나뭇잎들이 반짝이고요. 나무가 엄청 많더라고요. 그 밑동엔 버섯들이 막 올라와 있고요. 꽃은 또 얼마나 많은지 근처에만 가도 향이 진동을 하는 거예요. 슬쩍 만져봤는데 참 보드랍더라고요. 나중에 한 번 꼭 가보세요. 정말 좋아요.
20여분 동안 그녀는 신이 나 여행 얘기를 했다. 이렇게 말이 많은 사람이었나 싶다. 대꾸를 하거나 낄 틈조차 없어 내내 듣기만 하던 김원장이 눈을 마주치면서 옅은 미소를 지으니, 민주씨도 자신이 너무 흥분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차분하게 말한다.
제가 오늘 너무 떠들었죠? 아무튼, 좋았어서요.
여행 다녀오시길 잘한 것 같네요. 좋아 보이셔서 좋아요. 다음 진료도 잡아볼까요? 3주나 4주 뒤 어떠세요?
엇, 저, 그쯤에 여행을 한 번 더 다녀올 것 같아서요. 나중에 전화로 예약 잡아도 될까요?
네, 그러세요. 약은 일단 4주 치 처방해 드릴게요. 약 떨어지기 전에는 오셔요.
민주씨가 나가고, 다음 환자가 들어올 때까지 김원장의 귓가에 민주씨의 잔뜩 들뜬 목소리가 맴돈다. 김원장은 슬쩍 미소를 짓고, 다음 환자를 맞는다. 문이 열리며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 들어오고, 그가 불면을 호소하는 동안 민주씨의 목소리는 무언가의 뒷면으로 날아간다.
_
있을 리가. 내가 신이라면 이렇게 힘든 세계를 내게 주지 않았을 것이다. 무엇을 위해서 이 세계를 만들었고, 나를 이곳에 꾸역꾸역 넣어놨는지 모르겠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나는 이 너머에 있는 진짜 세계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_
민주씨는 그 후로 병원에 오지 않았다. 예약 전화도, 방문도 없었다. 김원장은 마지막에 들었던 민주씨의 목소리를 다시 떠올렸다가 이내 관두었다. 긴 여행을 간 것이리라. 그러고 보니 그 여행, 어디로 다녀온 거지? 여행지를 얘기했던가. 묘하게 들뜬 목소리와 알 수 없는 여행, 그 후로 보이지 않는 민주씨. 그런 생각을 하며 김원장이 미묘한 불안감을 느끼는 새 이내 다음 환자가 진료실에 들어온다. 민주씨에 대한 생각은 영영 세계의 뒷면으로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