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쾌락
<이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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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을 시작한 지 5시간쯤 지났다. 민주가 20cm 남짓 되는 대패를 쥐고 제 몸짓 만한 나무를 깎고 있다. 일주일 전, 다른 동기들이 A4용지 두 어장 분량의 작업계획서를 팔랑거리면서 들고 와 얌전히 발표할 때 민주는 커다란 나무 기둥을 끙끙거리면서 업고 나왔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녀만은 태평하게 제 옆에 나무를 세워 두고 땀을 닦으면서 "이 나무를 다 없앨 겁니다"라고 말했다. 민주의 당돌하고 거침없는 목소리가 사람들의 귓가를 파고들었지만 그 말을 단박에 이해하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잠깐의 적막 끝에, 누군가 묻는다. "작업계획서는 안 가져왔나?"
일주일이 지난 오늘, 민주는 다른 날보다 3시간이나 일찍 일어났다. 지난밤엔 설레서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해 힘겹게 잠들었고, 그 마음이 밤새 꿈에 나타나 민주를 들깨 볶듯 볶아댄 탓에 빨리 깨어난 것이다. 아직 해도 다 뜨지 않아 푸릇한 가운데 민주 혼자 부산스럽게 움직인다. 씻는 시간도, 옷을 고르는 시간도 아까워 대충 양치와 세수만 마친 채 모자를 쓰고 지저분하게 물든 작업복을 입었다. 가방도 없이 손에 대패 하나를 들고 나왔다. 5시가 막 넘었을 즘 작업실에 도착했다. 그리고 곧바로 손에 쥐고 온 대패로 나무를 깎아내기 시작했다. 대패는 이번 작업을 위해서 일부러 시켜 엊그제 도착한 새것으로, 날이 바짝 서 징그러울 정도로 반짝였다. 민주의 움직임을 따라 날카롭게 반짝였다가, 뿌옇게 흐려지길 반복했다. 대패질을 하기 시작한 지 20여 분 지났을 쯤부터 허리와 손목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더 시간이 지나서는 날갯죽지가 뻐근해졌고, 계속 서 있던 다리가 슬슬 부어오르면서 종아리가 저린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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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어싱 가게 앞에서 20분 정도 서성였다. 예약한 시간까지 20분이 남아 있었고, 다른 손님이 가게에 있었기 때문이다. 민주는 건너편의 사진 부스 앞에서 괜히 머리를 만지작거리면서 거울을 본다. 예약까지 했건만 막상 여기까지 오니 겁이 났다. 앞선 손님이 나가는 것을 보고 쭈뼛거리면서 가게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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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뾰족한 것이 무섭다. 주사를 맞는 것은 끔찍하고, 누가 칼을 쓰고 있는 것만 봐도 소름이 끼친다. 얼마 전 허리 신경에 염증이 생겨 한 차례에 주사를 여섯 번 찔릴 때에도 너무 오싹하고 무서워서 남몰래 눈물을 찔끔 훔쳤다. 그 후에도 통증이 이어졌지만, 그 주사를 또 맞는 게 괴로워서 병원에 다시 가지 않았다. 뾰족하고 날카로운 것들은 그렇게 뾰족하고 날카로운 통증을 남긴다. 뾰족하고 날카로운 것들이니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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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학기 내내 민주는 그 나무를 깎았다. 그녀는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7-8시간을 나무 깎는 일에 할애했다. 민주의 자리에는 얇게 저민 나무 조각들이 쌓였다. 함께 작업실을 쓰는 학우들은 왜 이런 작업을 하는 것인지 알고 싶어 민주 곁에 머무르면서 종알거렸고, 교수는 "이상한 놈들을 많이 봤지만, 이런 건 또 처음 보네"라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지만 민주는 어떤 말에도 대꾸하지 않았다. 나무 조각들은 하루 단위로 묶어 박스 안에 보관했다. 그 학기가 끝나갈 무렵 민주의 자리는 박스로 가득 차서 발 디딜 틈이 없었기 때문에, 학기말 발표 전날엔 작업실의 빈 구석에 쭈그려 앉아 손바닥만큼 남은 나무를 깎았다. 민주는 그 손바닥만큼의 나무를 다 없애기 위해서 밤을 새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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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통증이 살갗을 파고 들어온다. 시술은 생각보다 금방 끝났다. 겁에 질린 민주가 진작부터 눈을 질끈 감는 바람에, 무엇으로 구멍을 내는 건지는 보지도 못했다. 감은 눈 너머에서 "힘 주명 멍드니까 편안하게 있어요"라고 말하는 게 들려왔다. 그제야 꽉 물려있던 눈을 의식하면서, 마치 뭔가를 놓쳐버리는 것 같은 모양으로 힘을 풀어본다. 날카롭고 뾰족한 것이 눈썹 부근을 찌르고, 통과하여 뚫고 나오는 게 느껴진다.
살갗을 뚫고 들어온 이물질 위로 바람이 불 때마다 민주가 움찔거린다. 바람에 흔들린 앞머리가 눈썹 근처를 건드릴 때마다 아찔한 통증이 올라왔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바람에도 통증을 느낄 수 있다는 것에 새삼 싱그러운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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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한 학기 동안 무슨 짓거리를 한 건지 얘기해 보게."
민주의 차례가 되어 깎인 나무들이 모여 있는 박스 앞에 섰다. 얼마간 입을 다물고 있던 민주를 조용히 지켜보던 관중이 민주의 침묵에 반해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민주는 그저 그 소리를 듣고 있다. 한동안 소란을 관망하던 민주가 묵직하게 손을 들어 올렸고, 관중은 일순간 조용해졌다. 민주의 작은 행동 하나에도 관중은 아찔한 쾌감을 느낄 수 있었다.
모두가 숨 쉬는 것마저 버거워 호흡을 멈춘 채 눈만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고 있을 때, 민주가 대패를 들어 올린다. 그리곤 자신의 팔뚝을 깎기 시작한다. 관중의 멈춰있던 호흡이 뾰족하며 날카로운 비명이 되어 터져 나오고, 민주만이 태평하게 입을 꾹 다문 채 자신을 깎아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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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너무 소란스러워, 언제나 귀를 막고 있게 된다. 내가 틀어놓은 노래가 흐르는 소리 말고는 어떤 사람도, 어떤 자동차, 어떤 바람이나 어떤 마음도 소리를 내지 않게 된다. 바람이 이는 소리가 없으나, 살갗으로 느껴지는 것들은 날카롭다. 어느 때나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 거울에 얼굴을 들이민다. 눈썹을 관통한 피어싱을 보면서, 혹은 발갛게 부어오른 상처를 보면서 민주가 소리 없이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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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뾰족하고 날카로운 통증이 싫다. 그러나 그것 말고는 이만큼 끔찍하고 소름 끼치는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