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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보성 May 03. 2018

회색

    

집 밖을 나가기 전 신발장에서 멈칫거렸지

여러 빛깔 중 하얀 신발에 발을 구겨 넣고는 서둘러 문을 여니 눈 속으로 스며드는 아리따움에 나는 몸을 던졌어


음……     


아니야, 정확히는 검은 자와 흰자만으로는 담을 수 없는 다양한 아름다움에 과부하가 걸린 탓일 거야

나는 쓰려졌고 꽃들은 예상이라도 한 듯 넘어지는 나를 안아줬지   

  

그래, 꽃들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처음 본 이들은 도저히 형용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어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꽃들을 볼 수 있었어 누군가 내 하얀 신발을 고쳐 신겨 줬거든      


나는 꽃 위를 달렸어

내 걸음이 뿌려진 곳은 하얀 빛깔이 묻어났고,

펼쳐진 꽃들 앞에 뒤섞인 그 빛은 향기로웠어

내 물감에도 꽃가루가 묻어났지만 그것은 조화로웠어


꽃밭의 가장자리에는 그루터기가 있었고 거기에는 눈을 감은 소년이 앉아 있었어

나는 소년의 옆에 살며시 앉고서는 소년을 따라 눈을 감았어 그리고 다시 눈을 떴지 소년은 아직도 눈을 감고 있었어      


회색, 그것을 본 것은 그때였어 달이 태양을 밀어낼 때 즈음   


회색, 하늘과 그림자가 섞일 즈음    


꽃들은 잠이 들었고, 모두가 그 소년과 같아졌어   


내 하얀 신발은 빛이 바랬고, 달 위의 하얀 토끼는 검은 돌덩이 위를 뛰어다녔지

나는 토끼와 토끼가 밟고 지나가는 돌덩이가 회색이 되어가는 것을 보고는 소년의 손을 잡고 눈을 감았어               

2016.04.20.~ 2016.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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