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잘 키워볼게
대학 입학을 앞두고 기숙사 입사를 먼저 했다.
아침해가 뜨기 전 어둑할 때에 출발했는데 이미 기숙사 입구는 차들이 빼곡히 주차되어 있다.
작은 오빠가 기꺼이 함께 해주었다.
여학생 기숙사였지만 입사날이라 짐을 옮기는 가족들로 북적북적였다.
그때 처음 보았다.
내 또래 아버지들의 모습을
내 또래 아버지들은 저런 모습이구나.
내 또래 아버지들은 저 나이대겠구나.
얼굴에 뿌듯함과 설렘을 머금고 딸의 짐을 옮기는 아버지의 모습을 처음 보았다.
내 친구들은 저런 아버지와 살고 있겠구나.
그런데 나랑 놀면서 단 한 번도 아빠 이야기를 하지 않았구나.
고등학교 1학년때 만난 내 소중한 친구들은 함께하는 3년 내내 내 앞에서'아빠'라는 단어 자체를 꺼내지 않았다.
'굳이 뭐 하려고'라는 자존심(?)에 아빠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말이 쉽지 않았다.
친구들은 자연스럽게 내게 아빠가 안 계시다는 걸 알게 된 것 같다.
아빠와의 에피소드, 아빠에게 받은 사랑, 아빠에 대한 투정 등 이야기가 넘칠 텐데도 4명의 친구들은 신기하게도 그 단어를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들에게 그 단어는 애초부터 없었던 것처럼.
기숙사 입사날, 그날에서야 내 친구들의 아버지를 보았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넘쳤다.
부러움도 있었지만 그보다 그 어린 나이에 인내하고 배려해준 친구들에게 고맙고 미안했다.
"엄마 나 주말에 애들이랑 생일잔치하면서 놀고 싶어."
"너 생일잔치 안 한다며? 오늘 금요일인데 애들 주말 스케줄 있지 않을까?"
"기원이랑 은우랑 서준이만 초대하고 싶어."
나도 모르게 반가운 이름!
"그 3학년 때 반장 기원이?"
"응"
3학년 시작과 동시에 전학 온 기원이는 아들과 반장 선거에서 만났고, 동점 후 재투표에서 기원이가 당선되었다. 학교를 마치고 부반장이 되었다며 우는 아들을 달래며 난 그 아이가 너무도 궁금했다. 그런데 5학년 같은 반이 된 것이다.
어느 날 아이가 잠을 청하며 뜬금없이 말했다.
"엄마, 나 기원이랑 더 친해지고 싶어."
"왜?"
"애가 괜찮아. 배울 점이 많아."
친구 욕심도 별로 없고 살짝 자아도취가 있는 아들이 기원이랑 더 친해지고 싶어라고 하는 말의 뉘앙스에서 기원이를 동경하고 좋아하는 게 느껴졌다. 이 아이가 더더욱 궁금해졌다.
"그래, 그럼 오늘 학교 가서 토요일이나 일요일 중에 시간 되는지 물어봐. 그런데 너무 갑작스러워서 시간 못 낼 수 있으니까 조르지 말고 실망하지도 말고"
'그런데 기원이는 꼭 왔으면 좋겠다.'
"엄마~ 기원이랑 은우랑 일요일에 시간 된대. 서진이는 가족여행 가서 안된대."
"오 그래? 다행이다!(기원이가 시간이 된다니)"
"엄마, 일요일에 우리 보드게임방에 데려다줘요. 그리고 그날은 패드로 게임도 허락해 줘요."
"너희 보드게임은 안 하고 게임만 하는 거 아니야?"
"아니야, 기원이는 자기가 할 만큼만 하고 끄는 애야. 은우랑 나도 그럴게."
일요일 11시 40분-오후 5시까지 공식적인 생일파티 시간이다.
학교 앞에서 아이들을 태웠다.
"안녕하세요?"
"어 그래 안녕?(네가 기원이구나!)"
기대했던 대로다. 아이 눈빛이 참 좋다. 똘망함과 선함이 느껴진다.
"우리 감동이 학교에서 어때? 장난꾸러기지?"
기원이와 은우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근데 착해요."
기원이가 착하다고 한다. 뭔가 중요한 시험에 1차 합격 한 기분이다.
'우리 아들 좀 예쁘게 봐줘'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온다.
작은 방 틈으로 새어나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참 예쁘다.
초5 남자애들이 서로 다정하게 이름부르는 소리에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아이들의 노는 모습을 수시로 살피며 "괜찮아? 더 필요한 거 없어?"라는 말을 하면서도 내 눈은 기원이를 향해있다. 기원이가 불편해하진 않나? 재미없어하면 안 되는데 라는 생각이 왜 이리도 드는지.
"이제 가야 해. 정리하자."
가게를 나서 엘리베이터로 가는 와중에도 아들과 아들과 쌍둥이 같은 은우의 눈은 게임 화면을 보고 있다.
'너 오늘 생일이라고 제대로 만끽하는구나.' 아휴 그냥 내버려 두던 그때.
"이동할 때는 게임 끄지?"
오~ 부드럽지만 단호한 말. 기원이었다.
눈도 마주치지 않고 자연스럽게 핸드폰 화면을, 스마트탭 뚜껑을 덮는 두 아이의 모습이 어찌나 웃기던지.
'이 아이는 내 아들 옆에 있어야 한다.'
저녁 시간 숙제를 하던 아들 녀석이 갑자기 훌쩍이더니 눈물이 터졌다.
"왜?? 왜 울어?"
"엄마, 오늘 너무 재밌었어...ㅠㅠ"
"너무 좋아서 우는 거야?"
"응. 친구들도 너무 고맙고. 으앙~~"
"아들, 엄마도 오늘 기원이랑 은우 너무 맘에 들고 좋더라. 다음에 또 시간 만들어보자. 엄마가 더 좋은데 데리고 가줄게."
"네."
좋은 친구를 만나는 것.
내 성장을 돕는 친구를 만나는 건 정말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다.
현재 내 안에는 친구들에게 받은 배려와 사랑의 지분이 상당하다.
지금 비슷한 또래를 키우며 부모로 사는 내 친구들의 말과 행동은 고등학생 때 그대로다.
그렇다면 한 인간의 성격과 태도가 만들어지기까지는 부모와 10대 시절 친구들의 영향은 절대적이다.
하굣길 문구점 앞에 서서 가게 유리 안 머리띠를 보며 "아 저거 예쁘다."라고 했는데 다음 날 책상 위에 그 머리띠가 올려져 있었다. give & take. 나도 사람들에게 소소한 선물을 하는 기쁨을 알게 되었다.
야자 중에 장우동 가서 비빔만두 먹자는 귀여운 작당모의를 할 때도 돈 한 푼 없이 마음 편하게 친구들을 따라갈 수 있었다. 그래서 나도 밥 사는 것에 인색하거나 더치페이에 연연하지 않는다.
부교재를 조금이나마 싸게 사려고 버스를 타고 멀리 있는 서점을 갔을 때도 "이건 한 권밖에 안 남았네"라는 사장님의 말씀에 내 문제집 더미에 그 문제집을 올려놓던 친구의 손을 잊지 못한다.
이런 기억들이, 경험들이 어찌 내 삶에 지대한 영향을 주지 않았으랴.
나는 내 아들이 좋은 친구를 알아본 것이 기쁘고
그 아이가 괜찮은 아이임을 알게 되어서 더 기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최선을 다해서 그 아이를 내 아이 곁에 오래 두게 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내 아이를 더 매력 있는 아이로 키워야겠지.
"기원아, 우리 아들 잘 부탁한다."
"아들아, 너도 기원이를 놓치지 않길 바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