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엄마 생각이고
어서 와, 우리 반이 된 걸 환영한다.
<우리 반은 샤프 사용을 금한다>
1. 샤프를 사용하기에 너희 글씨가 여물지 않았다.
2. 샤프는 수업에 방해가 된다. '분해-조립-고장-분해-조립-샤프사망', 이 반복 과정에서 수업 내용 놓치고 분노지수 올라가고, 성격 나빠지고
저희는 안 그럴게요.
안돼.
지금껏 그 누구도 약속을 지키지 못했어.
어떤 애는 죽은 샤프 살리다 욕도 했어.
다른 반은 다 쓰는데요.
다른 반으로 갈래?
6학년도 이 규칙은 고수하고 있다.
반발이 있지만
어쩌겠나.
대장이 안된다고 하는데.
우리 집 아이도
이 규칙을 당연히 지켜야지.
착하기도 하지.
연필 잘 쓴다.
연필로 꾹꾹 눌러쓴 글씨, 정말 맘에 든다.
그런데
고학년이 되면서
문구점에 가도 샤프 코너로만 달려간다.
'샤프 샤프' 노래를 부른다.
샤프가 얼마나 공부에 방해가 되는데
전부 샤프 만지면서 시간 보내고!
글씨도 안 좋아지고!
고장도 잘 나고!
최고급 샤프면 고장이 덜 날까.
그 비싼 걸 네가 쓰기도 그렇잖아!
샤프 써도 글씨 잘 쓸 수 있어.
샤프 써도 집중할 수 있어.
애들 다 샤프 쓴단 말이야.
00 샤프는 심도 잘 안 부러져. 그거 사면 되지!
사줘!
나도 샤프 쓸 거야!!
자식을 어찌 이기랴.
졌다.
이 녀석을 키우며 내 규칙과 소신이 하나씩 펑-펑- 깨진다.
어린이날 선물로 샤프 5개 갖고 싶어요
브랜드별로 목록을 써서 주는데
이런 브랜드도 있었어?
'진짜 관심이 많았구나.' 하는 마음이 든다.
왜 이리 조용하지?
조용히 방 안에 고개를 들이민다.
-저런 집중력은 처음 봤다. 샤프를 분해하고 계신다.
방바닥이 왜 이리 더럽지?
-부러져 나뒹구는 샤프심의 영역표시를 닦는 건 내 몫이다.
글씨가 왜 이렇지?
-네 (유일한) 장점을 잃었구나.
이놈의 샤프!
정말 맘에 안 든다.
샤프와 사랑에 빠져 허우적대기를 3개월.
그냥 내려놓았다.
글씨 잔소리도
방바닥 샤프심 잔소리도
내려놓았다.
"엄마, 수학학원 가방 좀 챙겨 와 주세요"
가방에 문제집, 연습장을 넣는다.
샤프 쓴 이후, 아이 필통을 열어보지 않았다.
너 필통, 오랜만이다.
니 안은 또 어떤 상황이니?
엇,
샤프가 없다.
필통 안에는
샤프를 쓴 후 매몰차게 버림받았던
크고 작은 연필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내 아이는 이제
스스로 깨달아야 선택하고 행동하는 나이가 되었다.
훌쩍 커버린 아이가
무엇에 대해 관심이 생긴다면
무엇에 있어 갈등이 생길 것 같다면
먼저 경험해 본 내가
장, 단점을 알려주며 내 생각을 말하고
함께 지켜야 선을 합의하고
책임을 져보게 하는 것이
이제 내가 할 일이구나-
선택과 책임의 경험
그리고
그 무게를 느껴보도록.
나는 아이가 커갈수록
더 부지런히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흥분하지 않고
내 생각을 밀어붙이지 않고
"그래, 한 번 해봐. 그러나 이건 알아둬."
라고 차분하고 고상하게 말할 수 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