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보랏빛 파리의 저녁노을
Impression, Sunrise
French: Impression, soleil levant
1874년 4월 15일,
30명의 무명 예술가들의 첫 전시가 열렸다.
"인상 - 그것은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나도 그 작품에서 인상을 받았으니까.
이 얼마나 자유롭고 쉬운 작업인가!
이 바다 풍경이 걸리기 이전의 벽지 상태가 저 바다 풍경보다 더 완전하다"라고 폄훼했다.
이 글은 저널리스트 루이 르루아가 풍자 잡지 <르 사리바리>에 쓴 글이다.
그는 모네의 이 작품을 '인상' 밖에 없다고 혹평했고 이들을 '인상주의자'라고 비꼬았다.
전시회 참여자들은 모임 이름과 관련하여 '자연주의자'로 부르자는 에밀 졸라의 고집에도 불구하고, 르루아가 냉소적으로 붙여준 이름 '인상주의'를 기꺼이 선택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인상주의'라는 호칭은 그렇게 태생 되었다.
모네의 또 다른 출품작을 보면서 르루아와 뱅상이 나눈 대화다.
나(르루아)는 신중하지 못하게 이 작품 앞에 그를 너무 오래 내버려두고 말았다.
'아, 아!' 그는 메피스토펠레스처럼 비웃었다.
"이제 눈부시다고 해야겠군, 인상적이야.
그런데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
그림 아래쪽의 시커멓게 혀로 핥는 듯한 수많은 것들은 대체 뭐를 재현하다고 하면 좋을까?"
"걸어 다니는 사람들 아닙니까?"라고 나는 대답했다.
"내가 카퓌신 대로를 걸어갈 때 저렇게 보인다는 건가?
이런 활극이 있나! 결국 날 놀리는 게군?"
(존 리월드,<후기 인상주의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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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작년 1년 동안 매일 미술 퀴즈를 만들었다.
한 작가를 하루 정도 다뤘는데 몇몇 화가들은 예외였다.
특히 빈센트 반 고흐는 거의 두 달 가까이 만들었고 모네도 꽤 길었다.
그 무렵 한 미술 모임에 참석했다.
친구가 "인상파 화가를 좋아하는 친구"라며 나를 소개했다.
아마도 내가 모네의 아름다운 그림을 몇 번 공유했기 때문인 듯하다.
나를 발견했다.
"내가 인상주의 작품을 좋아한다는 것을"
인상주의 화가들은 재현적 사실 묘사가 아닌 시시각각 빛에 의해 변화하는 모습을 그렸다.
다시 <목로주점>으로 돌아간다.
랑티에는 제르베즈를 버리고 떠난다.
제르베즈는 함석공 쿠포의 끈질긴 구애를 받아들여 새 출발을 한다.
랑티에의 두 아들도 이미 있지만
쿠포의 예쁜 딸 '라라'도 태어난다.
쿠포가 지붕 위에서 작업을 하는 대목은
눈을 떼기 힘든 긴장감이 돌았다.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제 굴뚝에 함석으로 된 덮개를 씌우는 일만이 남았다. 그쯤은 눈 감고도 해치울 수 있었다.
.... 이제 그는 작업대 위로 몸을 숙인 채 예술가 같은 몸짓으로 함석을 잘랐다.
... 밝은 분홍빛을 띠던 태양은 색이 서서히 옅어지면서 연보랏빛으로 변해갔다.
하루 중 가장 평온한 그 시각, 투명한 하늘 전체를 배경으로 엄청나게 커 보이는 두 노동자의 실루엣이 사각의 작업대와 풀무의 기이한 윤곽과 함께 유난히 두드러져 보였다."
"아빠! 아빠! 나나는 소리를 질렀다.
"아빠! 여길 좀 봐요!"
딸을 좀 더 잘 보려고 몸을 숙이던 쿠포는 그만 발이 미끄러지고 말았다.
쿠포는 두 달이 지나자 몸을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겨우 안락의자에 앉은 채 종일 집안에 갇혀 있는 신세가 되자 불평이 늘어나고 자신의 운명에 대해 울분을 토해내곤 했다.
그리고 다시 걷을 수 있게 되자 자신의 일에 대해 은밀한 적대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유없이 에티엔(전 남편의 아들)을 때리기 시작했다.
쿠포는 타락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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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티에가 보았던 연보랏빛 파리의 하늘은, 옛 추억을 떠올리게 했다.
슬프도록 아름다운 도시, 파리!
몇 년 전인가 파리에서의 가족여행.
당시 초등, 중학생이던 두 아들은 이제 성년이 되었고 더 이상 여행을 따라 다니지 않는다. 그 파리의 연보랏빛 아름다운 저녁노을이 생각난다. 나는 언젠가 인상주의 화가들이 갔었던 그 길을 따라 가보고 싶다.
파리는 빠질 수 없는 곳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