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일아!"
수천 번, 수만 번을 들어보았을 그 말을 이젠 더 이상 들을 수 없다. 돌아가시기 9일 전 어머니를 뵈러 요양원에 갔을 때 나를 보시자 "성일이!"라고 반갑게 부르셨다. 마치 내가 어렸을 때 어머니가 나를 부르던 표정과 말투였다. 어머니는 젊은 엄마인 듯했고 나를 어린 아들인 것처럼 불렀다. 어머니는 한동안 내 이름을 먼저 부르신 적이 없으셨다.
그날 그린 그림이라고 보여 주셨다.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네, 진달래꽃 피는 곳에 내 마음도 피어, 건넛마을 젊은 처자 꽃 따러 오거든 꽃만 말고오~"
그날 어머니가 부르신 노래다. 신기하게도 전에는 부르신 적이 한 번도 없던 노래였다. 그냥 옛날 노래가 생각나셨을 거라 여겼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단순히 우연만은 아닌 듯한 가사에 다시 가슴이 먹먹해졌다.
나는 원래 눈물이 없다. 그래서 내가 울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돌아가시기 전에 느낀 슬픈 감정이 상상의 슬픔이라면 지금의 그 감정은 잔인한 현실의 슬픈 감정 같다. 요즘 상가에 갔을 때 다른 이의 우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나도 그러할 것이라 막연히 짐작했었다. 그들의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표정은 본심이 아니었다.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그 표정과는 다르게 마음속 깊숙한 곳에는 슬픔을 억누르고 있었던 것임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강원도 정선의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625 한국전쟁 때 문경새재를 넘고 영천 은해사를 거쳐 부산에서 피난 국민학교를 다니셨다. 전쟁이 끝났고 동생 심양홍과 종로구 익선동에서 서울 유학 생활을 시작했다. 앞집에 살던 어린 홍라희를 자주 봤었고 그의 어머니를 특히 좋아하셨다. 꿈에도 그리던 고향 강원도 정선과 은해사, 지척에 있는 종로 익선동에 모시고 가지 못한 게 나에겐 한이 되었다.
어머니는, 내가 태어나고 17년 후 42세에 아버지와 사별하셨다. 첫 손자 태어나고 맞벌이 아들 부부를 본가로 들여 손자 둘을 키워 주셨다. 65세에 분가한 나를 어머니는 따라오셨다. 본가에서 주무실 날에도 새벽에 아들 집에 오셨다가 밤늦게 돌아가셨다. 75세부터 치매 발병되어 나와 완전히 합가 하였고 올해 84세이셨다. 거의 한평생을 나와 함께 사신 셈이다.
이모네 집에서 함께 자란 동생은 배고픈 연극배우가 되길 자처했다. 지금은 파킨슨병에 걸려 거동이 불편하시지만 한때는 보스턴 마라톤을 뛸 정도로 건강한 체질이셨다. 이런 동생은 항상 어머니의 자랑이었다.
https://youtu.be/B1qJVKNW33k?si=3v_b7l6hX3Psiue5
아버지는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돌아가셨다. 지금의 슬픔은 41년 전 느꼈던 그것보다 다양하고 구체적이며 농도가 짙은 슬픔이었다. 이런 슬픔은 예상할 수조차 없는 것이어서 더 슬프게 다가왔다.
성당에 연령회가 있는 건 처음 안 사실이었다. 연령은 연옥에 머무는 영혼을 달래주는 것이라고 한다. 연령회 회원들은 매일 오셨다. 어머니가 천국에 가시고 영원한 안식과 평안을 얻을 수 있도록 기도해 주셨다. 마치 <나의 아저씨>에서 이 지안을 위해 후계동 사람들이 함께 장례를 치러주는 것 같았다.
85 동기회 박창수, 송준규, 양태회, 김동진, 이미경, 임장미, 이제숙, 한영배, 최훈 동기와 사진반, 합창단, 테세목, 108 암자회, 라이더스에서 많은 친구들이 와 주었다. 내가 가입하지 않은 서초 모임 친구들의 위로는 특별했고 대학 때 서클 선후배와 친구, 삼성카드 후배들도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와 주었다. 따뜻한 위로와 두 손을 꼭 잡아 준 이들이 한없이 고맙다. 따뜻한 포옹이라고 하고 싶다.
가장 먼저 달려온 두보, 멀리 지방에서 한달음에 와준 친척 동생들. 파주에서 3시간 걸려 온 황작가. 몇십, 십여 년 만에 보게 된 친지들. 모두 다 고마운 이들이다.
어머니를 모신 운구차는 장례미사를 위해 개포동 성당에 갔다. 외할아버지는 강원도 정선의 한 천주교 공소 회장이셨다. 공소는 신부님이 계시지 않는 시골마을의 성당 같은 것이다. 치매가 걸리신 후에도 어머니의 뇌세포에는 천주교와 성당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다. 주일이면 어머니는 아무도 없는 빈 성전에서 기도를 드리고 기뻐하셨다.
장례미사에서 신부님의 말씀이 있었다. "사람이 태어나는 것은 곧 죽음으로 향하는 여정의 출발을 의미합니다. 죽음으로 비로소 생이 완성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애석하게도 언제 죽음이 올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죽음은 더 슬프게 다가옵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과 함께한 시간과 여정을 기억할 때 삶은 의미 있는 것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프랑스어에서 '죽음'이란 말은 '존재했었지'라는 의미라고 한다. 신부님 말씀도 이런 뜻인 것 같았다.
돌이켜 보면 어머니는 70세부터 노화가 눈에 띄기 시작하였다. 사진촬영의 골든아워라는 말이 있다. 매직아워라고도 이 때는 해가 진 뒤 빛이 남아 있는 약 20~30분간의 짧은 시간이다. 하늘은 코발트블루와 마젠타 색으로 곱게 물든다. 다른 시간에는 볼 수 없는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진다. 이제 나에게도 '매직 아워'가 시작 됐을 것이다. 뜨겁게 타오르는 태양 같은 인생의 황금기는 아니지만 가장 아름답고 황홀한 시간이다.
우리에게 골든 타임은 얼마나 남았을까?
추모식장 정원에는 봄의 연한 초록색 나무와 풀들이 넘실 거렸다. 봄은 사람으로 치면 20년 청년 같다. 20대 청년과 자연으로 돌아가는 사람은 어색하면서도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듯 보였다.
천주교와 성당은 어머니의 고향 같은 곳이다. 그곳에 어머니를 모시고 왔다. 그곳은 어머니에게 편안한 안식을 줄 것이다.
지금 어머니는 하늘나라에서 나를 바라보고 계시고 내 마음속에 남아 있다. 이제 남아 있는 아들이 당신 몫까지 살아 주길 바라시며..
생전에 이 쉬운 말을 못 해드렸다.
사랑해요 엄마!
* 이 글은 지난 5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작성했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