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서 표제어 '고향'을 찾아보면 4가지 뜻이 있음을 알 수 있다.
1)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곳 (내가 살던 고향)
2)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곳 (아버지께서 고향을 지키고 계신다)
3) 마음속에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 (마음의 고향을 잃었다)
4) 어떤 사물이나 현상이 처음 생기거나 시작된 곳 (명곡의 고향)
표제어 '고향'에 붙어 있는 속담으로는 '고향을 떠나면 천하다'가 있는데 제 고향이나 제 집을 떠나 낯선 고장에 가면 자연 천대를 받기 쉬우며 고생이 심하고 외롭다는 말이다.
나는 요즘 아이의 고향에 대해 생각한다. 다음 달이면 아이에게는 자기가 태어나고 자랐던 영국에서 지낸 시간보다 한국에서 지낸 시간이 더 많아지게 된다. 지금은 누가 아이의 고향에 대해 물으면 영국에 대해 주절주절거리지만 앞으론 그래도 되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한 거다. 아이는 자기 고향을 기억하기엔 너무 어렸고 여전히 거기 사는 친구들 이야기를 종종 하지만 점점 잊어버리는 것도 많았다. 얼마 전, 몇 년 동안 매일 가서 핫초코를 마셨던 'Deaf Cat' 카페를 기억하지 못하는 아이를 보면서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어쩌면 앞으로 아이의 고향은 한국 어드메 이 산속이 될 수도 있겠다. 33학번 대학생일 아이가 기억할 자기 고향은 계곡이 흐르고 뻐꾸기가 울고 제철 들꽃들이 머리를 내미는 이곳일지도 모르겠다. 지금이라면 나중에 기억할 만큼 머리가 자란 어린이니까. 어제도 이 어린이는 아빠와 함께 땅속에서 찾은 말벌 애벌레를 주워다가 닭에게 먹이로 주었다. 그렇게 지금 아이에게는 고향이 심어지고 있다.
나? 인생에서 27년쯤 살았던 내 고향은 강남역 5번 출구이다. 85년부터 그랬다. 해외에 사는 동안 그 출구 이름이 9번 출구로 바뀌었어도 여전히 내 머릿속에는 5번 출구이다. 그 동네 아무데나 나를 떨구어놔도 어디가 어딘지 단박에 알아볼 수 있는 그런 곳. 사전 속 고향의 1번 3번 뜻을 따뜻하게 품고 있는 곳. 2014년에 재건축 추진으로 철거되었지만 2022년 7월,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던 곳. (아니, 내가 살던 집이 왜 박물관에 있어? 내가 그렇게 늙었어?!)
계획 없이 아이와 함께 방문했던 박물관에서 갑자기 마주한 고향 아파트는 그 당시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어서 개인적으로 너무 놀랐던 기억이다. 알고보니 당시 서울 중산층의 주거형태에 대한 전시였다. 진짜 저 인테리어였는데..! 진짜 저기서 박쥐가 나와서 경비 아저씨를 불렀었는데...! 진짜 저 밥통이었는데..! 완전히 똑같아...! 하면서 감탄을 했었다. 다만 늘 좋은 기억만 준 아파트는 아니었다. 1995년. 암투병을 오래하셨던 아빠는 병원 생활이 지겨워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하셨지만 결국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병원에서 돌아가셨다. 장지로 이동하기 전에 그토록 가보고 싶어했던 집에 한번 가게 해주자며 운구차량으로 동네를 한바퀴만 돌려고 했는데 경비 아저씨가 이런 차가 단지에 돌아다니면 안 된다며 입구에서 못 들어가게 했던 기억이 있다. 그때는 매우 섭섭했는데 지금은 다 지나간 일이다.
지금 사는 시골집이 고향이 될 아이에게는 어떤 섭섭한 기억이 있게 될까. 어떤 행복한 기억이 있을까. 보라색 지느러미 엉겅퀴를 엄마에게 주려고 마당에서 꺾었다는 아이에게 나는 어떤 기억을 주게 될까.
지난 주말에 서울 목동에 사는 친구집에 놀러갔었다. 친구는 중학생인 아이들과 아파트에 사는데 우리 아이가 오랜만에 방문한 아파트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까먹은 것에 대해 다같이 크게 놀랐다. 여기엔 앞에서처럼 '적잖이'라고 쓰지는 못하겠다. 매우 크게 놀랐다. 왜냐하면 아파트 단지에 있는 흔한 덩굴 장미를 마구 꺾어서 내 친구에게 선물했기 때문이다. 내 친구는 장미와 함께 딸려온 개미들을 보며 기겁을 했다. 나는 여기는 관리사무소에서 관리하는 공동화단이기 때문에 우리 마당처럼 꽃을 마구 꺾으면 안 된다고 타이르면서도 5개월밖에 되지 않은 시골생활이 아이를 이렇게 만든 걸 신기해했다. 너 아파트 살아봤잖아...? 아이는 엄마에게 하듯이 이모에게 마당에서 꺾은 꽃선물을 하고 싶었는데 중학생 오빠들이 꽃을 꺾지 말라고 할 때 왜 하지 말라고 하는지는 몰랐다고 털어놨다.
요즘 우리 동네는 유채꽃이 만발이다.
다시 살아볼 수 없는 박물관 속 내 고향 아파트와 예쁘게 많이 피어있어도 꺾지 않는 유채꽃이 어쩐지 닮아 있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