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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초하 Aug 31. 2023

이직 3개월 차, 낮아지는 자존감과의 싸움

10년 차 직장인의 이직 3개월 차 후기

 내가 이직을 결심했을 때 주변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가 있다. 일은 걱정 안 하지만 분명 자존감이 낮아지는 시기를 반드시 겪을 것이고, 그 고비를 넘겨야 한다고. 이직한 지 3개월이 지나는 요즘, 내가 딱 그 시기를 지나고 있는 것 같다. 자존감은 땅바닥을 추락하고 스트레스는 하늘을 치솟는다. 내 실력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생기고 있으며, 출근하는 것이 너무 싫다...


 첫 달은 하는 것 없이 남들 하는 업무 염탐하며 어떻게 일하는지 구경하였고, 두 달째엔 실무를 살살 경험해 보며 이 회사를 맛만 봤던 기간이었던 것 같다. "생각보다 할 만 한데?", "여기도 별거 없고만~" 하며 이유 없는 근자감도 부렸다. 하지만 입사 3달이 지나가는 요즘 나는... 모든 걸 던지고 도망가고 싶은 심정이다. 내가 과연 이 회사에서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영원히 적응하지 못할 것만 같은 불안감도 든다.


 이전 회사에서 나는 탑다운으로 내려오는 일들을 쳐내기 바빴다. 우스개로 내가 종종 했던 이야기가 있는데, "나는 이 회사에서 내가 원하는 일을 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였을 만큼 내 의지보다는 탑에서 내려오는 지시사항을 소화하느라 내 모든 공력을 쏟았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나에게 몰리는 일을 최대한 방어하면서 늘 보수적인 시각으로 업무를 대했던 것 같다.


 이직한 회사는 정반대의 회사다. 바텀에서 올려서 업무를 진행하는 구조고, 마케터의 기획이 곧 실행이 된다. 자유도가 무한대로 높은 만큼 실행과 그에 따른 결과도 담당자의 책임으로 온다. 물론 당연히 조직에서 책임은 팀장이 지지만, 양심 있는 담당자라면 과연 이 책임으로부터 면피가 가능할까?


 가장 힘든 건 이 무한대의 '자유도'에 있다. 이전 회사에서는 행사 하나를 기획하고, 보고하고, 모든 걸 의사결정받고, 이 의사결정을 토대로 실행하였다. 사실 이 '모든 걸' 의사결정받는 게 나중엔 질려서 퇴사 생각이 들었다. 배너의 문구 하나까지 다 정해주는 탑의 행태를 더 이상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의사결정을 받는 과정에 오히려 꽤 의지하기도 했다. 혼자 고민하다 애매했던 부분은 그때그때 팀장에게 보고하여 의문점을 해결하고 진행하였다. 그런데 이직한 회사에서는 엔간한 건 담당자의 판단에 맡기고 진행한다. 말로만 들었던 '네가 원하는 대로 해. 대신 결과만 내 와'가 실현되는 곳이다. 나는 내가 기획하고 업무를 진행하면서도 이게 맞는 것인가? 의 질문이 수도 없이 드는데, 이거에 대해 정답을 내주는 사람이 없다. 무엇보다 내가 마케팅하는 서비스는 이제 막 성장 중인 서비스이기 때문에, '정답'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정답이 없는 회사에서 일을 한다는 게, 꽤나 어렵고 적응이 안 된다.


 더군다나 이 회사는 언제나 something new를 권장한다. 어제보다 오늘 하나 더 새로운 걸 시도하고, 지난달보다 이번 달 하나 더 새로운 걸 시도하여 best practice를 만드는 걸 권장한다. something new를 만드는 것에 제한도 없다. 그것이 무엇이든, 담당자가 하고 싶고 효과가 있다 판단되면 실행할 수 있다. 이 무서운 자유도가 정말 적응이 안 된다. 이전 회사에서는 새로운 것을 제안하여도 통과되기가 힘들었다. '예전에 해봤는데 효과 없었다, ', '그거 해서 매출 얼마나 나오는데?'라는 무적의 질문으로 모든 시도를 눌렀다. 이러한 업무 분위기에 나도 젖어들어서,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후배에게 "그거는 우리 회사에서는 하기 어려운 내용이야"라고 먼저 선을 긋기도 했다. 이런 내가 something new를 추구하는 회사에서 어떻게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새로운 아이디어, 창의적인 생각은 1도 없는 내가 조금이라도 새로운 걸 시도해 보기 위해 아무리 짱구를 굴려봐도 뭐가 나오지 않는다. 다른 친구들은 너무나 새롭게 액션 아이템을 내는데, 나는 거기에 감탄만 할 뿐 이렇다 할 시도를 해보지 못하고 있다.


 이번주엔 나도 나름대로 새롭게 해 보려고 노력을 해봤는데, 어쭙잖게 새로움을 추구하려다가 오히려 안 하니만 못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나의 어쭙잖았던 시도를 수습하고 내 초기 기획 의도와는 다른 결과물을 받게 되면서 내 업무 능력에 대한 근원적인 고민까지 들었다. 내가 과연 일을 잘하는 사람인가? 내가 이 회사에서 잘 적응할 수 있을까? 내가 과연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출할 수 있는 사람인가? 점점 땅을 파다 지구 내핵까지 뚫을 정도로 자존감이 낮아지게 되었다.


 나에게는 사실 (민망해서 어디다 말은 못 했지만) "공부든, 일이든 마음먹고 노력하면 충분히 잘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일도 공부처럼 내가 마음먹고 노력하면 잘할 수 있는 분야라는 믿음이 있었다. 근데 3n 년 평생 나를 지탱해 주던 이 믿음이 최근에 좀 흔들리고 있다. 1등이 되고 싶은 마음은 애초에 포기했다. first가 못된다면 best follwer라도 되어야지라고 지난주에 마음을 먹었는데, 이번주는 내가 best는커녕 worst follwer인 것 같다. 나이, 연차는 먹을 만큼 먹었는데 나잇값, 월급값 못하면 worst잖아...


 그래 대충 살자!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말자!라고 머릿속으로 생각하는데 자꾸 잘하고 싶은 마음이 내려놓아지지 않나 보다. 나이 먹고 이직하는 게 어렵다더니 이래서 어려운 거구나... 내 연차만큼의 업무 퍼포먼스를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은 애초에 포기했다. (진작 글렀다.) 남들 하는 만치라도 따라잡고 싶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토로하면, 이직 3개월 차에 어렵고 힘든 건 당연한 거 아니냐는 답변을 제일 많이 받는다. 근데 이 회사에는 이직한 지 1년 미만인 친구들이 너무 많다. 그래서 이직한 지 3개월밖에 안 됐다는 사실에 결코 면피가 안된다 싶고, 내 마음이 더 조급해지는 것 같다.


관성을 거스르는 게 얼마나 힘든데, '9년짜리 관성 거스르는 건 보통 일이 아닐 거야! 그니까 연차 많은 내가 제일 힘들어!'라고 스스로를 위로해 봐야지 별 수 있나 싶다.


 언젠가 이 모든 고비를 다 넘기고 훌륭하게 잘 적응한 내가 이 글을 다시 읽으며 '내가 이랬던 적이 있었네'라며 와하하 웃었으면 좋겠다. 사실 그러길 바라며 쓴 글이다.


수습 기간이 끝나고 회사에서 온 축하 꽃다발



이직한 지 3개월이 지나고, 수습 딱지를 떼면서 쓴 일기입니다.


벌써 이직한 지 3개월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자리를 잡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 때문에 조급한 마음이 절정에 다 달았던 시기로 기억해요.


이직한 지 9개월의 시간이 지난 지금 제 마음 상태는 어떨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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