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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초하 Feb 18. 2024

야근 스트레스 처방전, 달리기 명상

AM 09:00

아침에 출근하며 오늘의 TO DO LIST 1번으로 작성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6시 칼퇴하기. 비록 지키지 못할 약속일지라도 꿈은 크게 가져야 한다. 오늘 해야 할 업무리스트를 적어보니 딱 봐도 칼퇴근은 힘들어 보였다. 그래도 미치도록 간절히 하고 싶었다. 6시 칼퇴!


PM 18:00

하지만,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지 오늘도 칼퇴는 물 건너갔다. 나는 해탈한 상태로 모니터만 응시했다. 어차피 난 지금 당장 퇴근할 수 없다. 아침에 적은 체크리스트들 중 클리어하지 못한 일들이 아직 많이 남아있었다. 기분 전환이 필요하다. 지금 당장 내 기분을 좋게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명상? 아니야~ 명상 너는 지금 고개를 내밀 타이밍이 아니야. 핸드폰으로 배달 어플을 켰다. 지금 내 기분을 좋게 할 수 있는 건 배달 음식 밖에 없어. 그래도 최소한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좋아하는 브런치 가게 마마스에서 리코타치즈샐러드와 샌드위치를 시켰다. 그래, 맛있는 저녁을 먹고 즐겁게 야근을 해보는 거야! 아자!


PM 19:00

리코타치즈샐러드와 샌드위치를 먹었다. 스트레스를 먹는 것으로 풀고 싶었는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풀 떼 기를 흡입했다. 하도 급하게 먹어서 그런지 기분 나쁘게 배가 부른 것 같았다. 지금 바로 책상에 앉으면 얹힐 것 같았다. 그래, 식후 걷기는 불로장생의 비결이랬어. 나는 패딩을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동네 한 바퀴 걷고 올 생각이었다.  봄이 다가오고 있지만 아직은 추운 밤공기를 얼굴로 느끼며 짧은 산책을 나갔다.


- 마케팅 요청 개발 과제건 정리는 언제 다 마무리하지? 내일 이야기하기로 했는데.

- 참 나 아직 이번주 푸시 타겟팅도 못 했어.

- 내일 비용 집행할 게 있는데 시행품의 결재는 왜 아직도 완료되지 않은 거야?

- 그 어드민은 처음 써보는 건데 내일 실수 없이 잘할 수 있을까?

- 참, 이벤트페이지 기획서도 오늘까지 써야 하는데... 이건 그냥 내일로 미룰까?


양발은 서로 번갈아가며 땅을 딛길 반복하는데 내 머릿속은 책상 위 모니터 앞에 있었다. 내 속에서 통제되지 못하는 생각들이 저마다 소리 없는 아우성을 내지르고 있다. 그 아우성이 마치 비명과 같아서, 듣는 나도 점점 머리가 아파졌다.





PM 19:30

다시 책상 앞으로 왔다. 그리고 오늘 일과시간 중 못했던 일들을 하나씩 처리하기 시작했다. 당장 내일 미팅 때 필요한 개발 과제건 정리부터, 푸시 타겟팅까지 일과시간에 못한 일들을 하나씩 체크하며 완료했다. 이벤트기획서 쓰는 것은 그냥 내일로 미루기로 했다. 내일의 내가 알아서 하겠지 뭐.


전체적으로 확인을 하고 퇴근하려는데 뭔가 이상한 게 눈에 보였다. 오늘 오후, 내가 셋팅한 이벤트가 제대로 적용이 안되어 있었다. 엇? 이러면 안 되는데? 모니터에 얼굴이 빨려 들어갈 기세로 미친 마우스 스크롤을 시작했다. 잘못 세팅한 건 없는데, 뭐가 문제인거지? 예상치 못한 변수에 내 심장은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미 퇴근시간이 한참 지난 시간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분께 DM으로 문의를 하였다. 다행히 아직 상대분도 퇴근 전이셨다. 죄송한 마음과 함께 물어보았는데, 다행히 싫은 내색을 보이진 않으셨다. 예상치 못한 버그 문제인 것 같다고, 일단 조치를 취했으니 문제의 원인은 내일 오전 확인 후 공유 주시겠다고 했다. 두근대던 내 심장도 다시 잠잠해졌다.


PM 21:30

퇴근 버튼을 눌렀다. 한차례 예상치 못한 작은 소동을 겪었더니 혼이 나간 기분이다. 나 이대로 오늘 하루를 끝내면 기분이 안 좋을 것 같아. 이 기분을 끝내려면... 그래 운동을 해야 해. 운동하러 가자.


PM 21:40

집 바로 앞 헬스장에 왔다. 헬스장도 조금 있으면 문을 닫을 시간이었다. 짧고 굵게 할 수 있는 운동이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 런닝머신 앞에 갔다. 헤드폰을 쓰고, 적당한 음악을 플레이하고, 스피드를 올려 달리기를 시작했다. 오늘 하루 나를 괴롭히던 아우성들을 다 내 마음속에서 내쫓고 싶었다. 두 발이 번갈아가며 트레드밀 위를 내디뎠다. 그리고 어김없이 내 안에 통제되지 못하는 생각들이 나에게 소리 없는 아우성을 내질렀다.


- 품의 전결이 절반까지 밖에 안 왔는데 내일까지 완료가 안되면 어떡하지?

- 내일 어드민 처음 써보는 건데 실수해서 돈 잘못 나가면 어떡하지?


소리 없는 아우성이 비명처럼 들릴 때마다 트레드밀을 내딛는 내 양발에 집중했다. 발을 내딛는 양쪽의 힘은 균형이 맞는 것일까? 왼쪽 발에 좀 더 힘이 들어가는 것 같아. 의식적으로 오른쪽에도 동일한 힘이 들어갈 수 있도록 발을 내딛으며 밸런스를 맞춰보자. 달리면서 내쉬는 호흡도 신경 써볼까? 코로 숨을 들이쉬고, 코로 숨을 내쉬고. 숨이 가빠질수록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의 속도도 점점 가빠진다. 호흡할 때 내 배는 어떻게 움직이고 있지? 숨을 들이쉴 때 배가 들어가고, 내쉴 때 배가 나오고 있을까? 달리다 보니 느껴지는 출렁이는 뱃살이 영 신경 쓰이네. 이 뱃살은 언제쯤 사라지려나? 괜히 뱃살이 신경 쓰이니 배에 살짝 힘을 준다. 앞뒤로 움직이는 양팔도 한 번 의식해 볼까? 어깨에 힘이 들어가진 않았나? 어깨는 내리고, 팔은 앞뒤로 흔든다. 왼발이 나가면 오른팔이 나가고, 오른발이 나가면 왼팔도 같이 나간다. 마라토너처럼 멋지게 달리고 싶어. 어깨를 피고 고개를 들어 창문을 본다. 창문에 비친 달리는 내 모습이 보인다. 멋진 마라토너를 꿈꾸지만, 현실은 런닝머신 위에서 헤드폰을 낀 채 진지한 표정으로 제자리 달리기를 하고 있는 사람이다. 쓸데없이 진지한 표정이 꽤 재밌다. 괜히 한 번 미소를 지어본다. 미소를 지으면 뇌가 얼굴 표정을 기억해서 지금 기분이 좋은 상태라 판단하여 긍정의 호르몬 세로토닌을 분비한다고 한다. 어느 날 책에서 읽었던 내용을 떠올리며 더 밝게 미소 지어본다. 누가 보면 이상한 사람 같겠지? 근데 이렇게 계속 웃는 표정 지었다가 팔자주름이 더 심해지면 어떡하지? 나는 계속 웃고 있고, 내 양발은 번갈아 런닝머신 위를 내딛고 있으며, 내 팔도 교차하며 앞뒤로 움직이고 있었다.


PM 10:10

헬스장이 곧 문 닫을 시간이다. 20분의 짧은 달리기를 끝냈다. 헤드폰을 벗고 정수기에서 물을 따라 마셨다. 달릴 땐 몰랐는데 꽤 땀이 났나 보다. 뿌듯한 기분으로 수건을 들어 땀을 닦았다.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니까, 달리고 나니 기분이 좋아졌다. 칼퇴근을 못해서 짜증 났고, 야근을 해서 짜증 났고, 예상치 못한 변수를 만나 더 짜증 났었다. 그런데 20분 동안 달리기에만 집중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오늘 하루종일 나를 괴롭혔단 생각의 아우성이 잠잠해졌고, 꼬리에 꼬리를 물던 걱정도 사라졌다. 드디어 회사와 나의 연결고리가 끊어졌다. 이제부터 나는 자유롭게 이 밤을 보낼 수 있다!


어떠한 활동이건, 그 활동에 최선을 다해 집중하면 명상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중요한 건 "지금 이 행위를 하는 나에게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가"이다. 나에게 집중하지 않으면 명상의 효과는 없다. 동네를 걷고 있지만 마음은 모니터 앞에 있어 회사 생각의 아우성에 시달렸던 오늘의 저녁 산책이 그랬다. 하지만 조금 전 달리는 시간은 달랐다. 20분간 달리기를 하며 의식적으로 움직이는 내 몸에만 집중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마음이 편안해졌고, 나를 하루종일 괴롭히던 야근 스트레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아마 달리며 집중하는 20분의 시간 동안 야근 스트레스로 활성화된 나의 편도체가 안정화되고 기분 좋은 생각과 내면의 긍정적 기운이 발휘되었을 것이다. 달리기와 명상은 지나치게 활성화된 편도체를 안정화시킬 수 있는 최고의 처방전이다.


퇴근 후 운동하러 가야겠다고 마음먹은 나에게 칭찬의 쌍따봉을 날린다. 나는 오늘 나에게 달리기라는 처방전을 내렸고, "집중"이라는 복용법으로 야근 스트레스를 치료했다. 이제 편안한 마음으로, 좋아하는 책을 읽으며 자유로운 밤의 시간을 보낼 차례다. 내일의 걱정은 오늘의 것이 아니다. 그저 지금 이 순간만 존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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