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3억 원.
이혼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하기로 결심하기까지는 숱한 밤을 지세웠지만 그 절차는 합의서에 도장을 찍는게 전부였다. 21년간의 결혼 생활이 끝났다.
서판교 34평 아파트를 14억 원에 팔았다. 은행대출 3억 원을 상환하고 남은 11억 원 중 6억 원을 아내에게 주고 5억 원을 내 통장에 넣었다.
3억 원을 비트코인에 투자했다. 남은 2억 원 중 1억 원은 3년간 딸 양육비로 미리 아내에게 주었다. 그리고 앞으로 3년간 돈세이돈 직영점과 갸맹점 9곳에서 나오는 수익은 모두 아내 몫으로 돌렸다. 추가 가맹 사업은 여동생에게 맡겼다.
이제 나에겐 통장 잔고 1억 원이 전부다.
1억 원이 떨어질 때까지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1억 원으로 3년을 살아보기로 했다. 막상 마음은 먹었지만 떠난다는 건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언제 어디로 무엇을 하러 갈지를 정하는 것부터가 생소했다. 살면서 좀처럼 떠나기를 해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비로소 깨달았다.
일곱살부터 스물여섯까지는 학교를 다녔다. 아침에 눈을 부비고 일어나 도시락 가방을 끌어안고 만원 버스를 타고 거의 20년간 학교를 다녔다. 학교를 다닌다는 건 너무 당연했다. 왜 가는 지, 무엇을 공부하고 싶은 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마치 정해진 알고리즘처럼 20냔간 그냥 학교를 다녔다. 상당히 편한 일이었던 것 같다.
그 후 25년간 신문사를 다녔다. 기자란 직업은 생각해본 적이 없는 데 기자가 됐다. 돌이켜보면 나영석같은 오락 PD를 하고 싶어 방송국 시험을 몇차례 봤었다. 공중파 방송국 입사 시험에서 연이어 떨어지고, 한국일보 원서를 내러가는 스터디그룹 선배들을 따라 갔다 서울경제 원서를 냈다. 사회정의엔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한국일보 원서를 내는쪽 줄이 서울경제보다 길었다. 시험 경향을 놓치지 않으려고 본 시험인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처음본 신문사 시험에서 합격통지서를 받았다. 서울~대전간 새마을호 주말 열차표 가격을 묻는 문제가 나온게 합격에 도움이 된 듯 하다. 대전이 고향이라 대학을 다니기 위해 서울에 온 뒤 한달에 한번 열차를 탔었다.
1997년 12월 1일 신문사로 첫 출근을 했었다. 점심 먹고 술먹고, 저녁 먹고 술먹고, 술먹다가 또 술먹는 일상의 반복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꽤 낭만적이었던 것 같다. 적어도 신입기자땐 술값이란 걸 써본 적이 없으니까. 대학교 3학년 때 미국 어학연수를 8개월 동안 갔었다. 맥도널드 빅맥과 학교 카페테리아 파스타, 주말에 배달해 먹었던 라운드테이블 피자가 그나마 입맛에 맞아 8개월 동안 그 것들만 먹고 살았다. 68kg에서 83kg까지 살이쪘었던 걸 겨우 뺐는데 기자가 되고 다시 몸이 불기 시작했다. 소주와 삼겹살을 그렇게 먹고도 살이 안찌는 선배 동료 기자들이 신기할 정도였다.
입사 후 3일만에 경제 부총리가 TV에 나와 IMF 구제금융 신청을 했다고 발표했다. 경제부 교욱을 받던 때라 멋도 모르고 발표문을 그냥 노트북에 타이핑을 했다. 손가락이 바빠 내용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한달쯤이 지나서였을까. 엉거추춤한 걸음걸이기 시그니처였던 당시 사장이 기수 간사인 동기를 불러 여섯명 중 세명이 신문사를 나가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 여섯명이 회의를 해 남을 세명과 나갈 세명을 정하라고 했다. 인사과장을 시키기 않고 직접 와서 말해준 건 그가 참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이란 방증였다.
IMF 체제가 되면서 고용시장이 얼어붙은 건 신문과 방송도 마찬가지였다. 기업들이 자금사정이 안좋으면 광고부터 줄이기 때문에 경기가 안좋으면 신문사 금고부터 돈이 마른다.
배고플 게 뻔한데 나가겠다는 동기도, 누가 나가야 할 지를 정할 기준도 없었다. 불행히도 월급을 받지 않고도 편히 살 수 있는 부자가 동기중엔 없었다. 두세 시간 동안 상황이 안좋다고 막내기수를 내보내겠다는 신문사에 다니게 된 걸 원망하며 동기들은 서로의 얼굴만 쳐다봤다. 결국 우리는 세명의 월급을 여섯이 나누어 받겠다는 묘안을 들고 사장실로 갔다. 누가 생각해도 좋은 아이디어였다.
간사의 말을 들은 사장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한국일보사도 14명의 동기중 일곱명이 나가기로 했으니 무조건 세명을 내보내야한다는 것이다. 어처구니없었지만 그는 사장이었고 우리는 수습기자였다.
다음날 나이가 어린순으로 세명을 내보내기로 했다는 통지를 받았다. 재취업 확률이 상대적으로 크다는 이유였다. 당시 내 나이는 스물여섯으로 한국일보를 포함한 동기 20명 중 여자 사진기자 한명을 빼고는 가장 어렸다.
가장 어린 나이에 신문사에 들어왔다는 이유로 나는 그 신문사에서 잘렸다. 그로부터 1년 3개월 뒤 신문사에서 다시 복귀해도 좋다는 소식을 갖고 선배가 찾아왔다. 신문사에서 잘릴 당시 노조위원장을 했던 선배였다. 당시 그는 노조를 보호해야 한다며 막내 기수의 불행을 방관했었다. 신문사는 수습 6개월간은 노조원이 아니다.
나는 1년 3개월만에 신문사에 복귀했다. 그 시간동안 PD를 뽑는 방송국 시험은 단 한건도 없었다. 내 인생에서 첫 번째 굴욕이었고 그 것이 마지막은 아니었다. 이젠 그 때를 기억하는 게 예전만큼 힘들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