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코인 투자를 위해 이혼을 결심하다.

6. 이라크 전쟁

by 김창익

나는 스스로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 시나브로 불만투성이가 됐다. 지금 생각해보면 1999년 복귀 당시 배치받았던 정보통신부는 당시로선 대부분의 기자가 선망하는 부서였다. 복귀 소식을 들고 왔던 전임 노조위원장 선배의 말로는 97년 입사 초기 선배들이 나를 이쁘게 봤었다고 했다. 1년반 사이 나는 상당히 시니컬한 사람이 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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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만은 나의 시각을 좁히고 그 것은 연쇄적으로 기회를 좁혔다. 입사 초기 도곡동 주공 아파트에서 4500만 원 에 전세를 얻어 자취를 했는데 2002년 재건축 붐이 일면서 6억5천만 원으로 뛰었다. 7000만 원만 융자를 얻어도 살 수 있었는데 눈앞에 황금을 두고도 나는 그 것을 잡지 못했다. 출입처였던 새롬기술이란 인터넷 전화 업체의 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으면서 알고지내던 지인들이 속속 미국 유학을 떠났다. 동생처럼 아꼈던 당시 네이버 홍보과장은 스톡옵션 일부를 팔아 대치동에 은마아파트를 2억 원에 사놓고 석사학위를 따러 출국장으로 향했다. 그가 돌아올 때 은마아파트 가격은 9억원이 돼 있었다. 유학생활에서 2억 원을 썼는데 아파트 값은 7억 원이 올랐다. 내 주변에서 온갖 기회들이 두더쥐처럼 솟아 오르는 데 나는 경제지 기자란 막강한 망치를 들고도 한 마리의 두더쥐도 때려잡지 못했다. 세상 원망에 사로잡혀 내뿜는 담배연기와 함께 온갖 기회들이 날아갔다. 이런 일들은 내가 정신을 차리는 자극제가 되지 못했다. 오히려 아쉬움이 반복되면서 불만은 눈덩이처럼 커졌다. 나를 가장 힘들게 한 건 무너진 자존감이었다. 세상 누구도 두려울게 없는 근자감의 화신이었는데, 70억 인구 중에 가장 어리석고 불행한 사람이란 생각에 사로잡혔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해가 잘 안갈정도였는데, 자존감은 한번 무너지면 소용돌이에 휘말려 좀처럼 회복하기가 힘들다. 인정하기 싫어 병원에 가지 못했지만 아마도 상당기간 우울증에 시달렸던 것 같다. 며칠전 고등학교 3학년 수험생인 딸과 스파게티를 먹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을 활짝 열어놓으면 기회가 새벽 아침의 새처럼 가슴팍에 날아든다고 말해주었다. 과거의 나에게 들려주는 심정으로 한 말이다.


3년 반 IT 기자 생활을 마치고 국제부로 발령이 났다. 부서 이동 FA 시장에 나온 나를 선뜻 데려가겠다는 데스크가 없었던 모양이다. 국제부는 내근직이어서 보통 기자들에겐 기피 부서다. 부서의 위치도 편집국 제일 구석진 곳이었다.


당시 국제부 데스크는 한 종합지 미주 지사에서 온 40대 싱글남이었는데 봄바람에도 버버리 코트깃을 세워 코를 막지 않으면 기관지가 아프다고 했고, 그 때까지 첫사랑 사진을 지갑에 넣고 다니는 로맨티스트였다. 한번 사이가 틀어지면 회복하기 힘든 캐릭터였는데 그에 대한 나의 태도가 그리 호의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당연히 그와는 되로 주고 말로 받는 사이가 됐다.


국제부 적응이 채 끝나지 않은 2002년 3월 이라크 전쟁이 터졌다. 이 전쟁은 내가 달러 패권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된 사건이다.


이라크 전쟁은 2001년 9.11 테러의 보복적 성격이었는데 의아했던 건 테러범은 사우디 아라비아의 빈 라덴인데 공격 대상은 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인가였다. 물론 디테일하게 따져보면 이라크 전쟁의 명분은 대량살상무기였지만 아들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당시 이라크를 공격한 건 9.11 테러에 대한 자국민의 분노를 달래야 했다는 절박감이었다. 한국인과 중국인, 일본인이 그들의 눈엔 그저 아시안인 것처럼 빈 라덴이든 후세인이든 코큰 아랍인들을 때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전쟁의 명분이었던 대량살상무기는 폭격 개시 직후 거짓으로 밝혀졌다. 많은 전문가들이 이라크 전쟁의 숨은 목적은 석유라고 했다. 하지만 이라크 전쟁 발발 전인 2002년 3월 초까지 배럴당 20달러 선이었던 국제 유가는 전쟁이 끝난 2004년 12월 배럴당 160달러 선까지 거의 여덟배 치솟았다. 이라크 석유를 딕 체니 부통령 소유의 헨리버튼이 장악하면서 공급 부족으로 석유값이 급등했다. 석유 시장 안정을 위한 전쟁이란 분석도 결과적으로 오판인 셈이다.


그렇다면 이라크 전쟁은 단지 9.11 테러의 화풀이였던 것일까.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호기심을 자극했다. 당시 아들 부시는 후진타오 중국 당시 국가주석에게 위안화 절상을 요구하며 틈만 나면 잽을 날리고 있었다. 무역적자의 책임을 상대국에게 덮어 씌워 엔화와 마르크화의 절상을 강제했던 1984년 프라자합의를 그대로 답습했던 것이다. 아들 부시 또한 달러 패권을 지켜야 연임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중국은 카운터 펀치를 날릴 대상은 아니었다.


2002년 3월은 기축통화 역사에선 변곡점이 되는 달이다. 1999년 출범한 유로 인덱스가 달러 인덱스를 사상 처음 웃돈 순간이었다. 간단히 말해 독일과 프랑스를 필두로한 유로가 미국의 달러 패권에 칼을 들이댔다는 의미다. 달려 패권에 대한 도전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이란 의미였다.


전쟁은 기축통화 패권과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달러가 파운드로부터 기축통화 패권을 이어받은 건 전비 마련에 금을 미국에 판 처어칠 당시 수상이 루즈벨트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준 선물인 셈이다. 2차 대전 직후 브레튼우즈 회의는 달러에 대한 대관식이었다. 두번의 세계대전 후 금태환의 대상인 기축통화는 달러가 됐다.


나는 이라크 전쟁과 인근 지역인 유로 경제의 부상간에 관계가 있지 않을까란 생각을 했고, 당시 월스트리트저널, 파이낸셜타임즈, 인민일보 등 3국의 외신을 크로스로 확인하며 관련 기사들을 찾아 연구했다. 미국의 시각과 영국의 시각, 중국의 시각 등을 종합하면 보다 객관적인 사실에 가깝게 접근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유로의 엔진인 독일과 프랑스 경제는 이라크 전쟁 후 5년간 제로% 안팍의 성장을 했다. 마이너스 성자을 한 해도 있다. 2% 내외의 물가상승률을 감안하면 두 부자 나라의 경제는 5년 연속 뒷걸음을 친 셈이다. 독일과 프랑스는 석유가 한방울도 나지 않는 나라로 중동과 러시아에서 에너지 대부분을 수입한다. 석유값이 여덟배 오르는 사이 유로 경제는 망가지고 포르투갈, 아일랜드, 그리스, 스페인 등 유로권 4개국은 PIGS(돼지들, 각국의 이니셜 합성어)로 불리며 국가 부도사태를 맞았다. 당연히 유로는 패배의 대가로 발꿈치가 잘리는 신세가 됐고 아직까지 제대로 걷지 못하는 신세다.


나는 달러 패권의 위력을 다시 한 번 실감했고, 이같은 연구 결과를 토대로 '월저바보: 달러 패권을 위한 미국의 정책과 음모'를 기획해 언론재단에 출판기획안을 보냈다. 언론재단이 이 기획을 채택해 2005년 2월에 책이 출간됐다. 당시 아내는 지금 수험생인 딸을 출산해 산후조리원에 있을 때였다. 나는 책 앞머리에 당시 딸에게 편지를 썼꼬 딸이 열살이 됐을 때 책을 선물로 주었다. 물론 2023년 현재 고등학교 3학년인 그는 책 내용을 아직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지만, 책은 읽는 대상일 수도 쓰는 대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무조건 아빠보다는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딸이 아빠도 책을 쓰는데?란 생각을 했다면 내 계획은 성공이다.


이라크 전쟁이 화폐전쟁이란 관점에서 영국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토니 블레어 영국 당시 총리가 아들 부시의 전쟁 발발을 적극 지지했었기 때문이다. 이라크 전쟁이 유로 경제를 무너뜨리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었다면영국이 왜 미국에 동조했을까.


영국은 북해산 브렌트유의 산유국이다. 당시 유로 회원국이지만 유로화를 쓰지 않고 파운드화를 고수했던 나라다. 유가가 오르고 독일과 프랑스 경제가 후퇴하면 반사이익은 영국의 몫이다. 지금은 유로에서 엑시트를 한 브렉시트의 나라다. 당시 독일과 프랑스가 토니 블레어를 부시의 개라고 조롱했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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