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을 다 바친 그 집을 그리며
“내가 왜 이럴꼬 정신이 없어”
“내가 너무 오래 살아서 이렇지”
“빨리 죽어야 자식들이 편할 텐데”
“이렇게 오래 살면 안 돼야”
“개고생 말띠”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어르신은 치매환자다.
“개고생 말띠”라는 의미는 ‘경오년 말띠’라는 뜻이었다.
그 시대 대부분 어머니들은 까막눈이라 해도 부끄럽지 않을 때였다. 이 어르신은 한글은 물론이고 일본말도 잘하며 집 주소를 확실하게 다 기억한다. 오칸 두줄 배기 기와집이 몇 채며 손님 접대한 내력을 거침없이 읊으시는 걸 보면 부잣집 마나님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남동생 여섯은 다 잘 생겼는데”
“딸 하나를 목 딱 같이 낳아 놨다.”며 자신의 생김새까지 너무 잘 안다. 때로는 불만스러워 하지만 남성미가 더 잘 어울릴듯한 외모와 큰 체격만큼이나 성격도 화끈하고 시원시원하다. 종갓집 맏며느리로서는 훌륭하게 임무수행 잘하셨을 듯하다.
일몰 증후군이 특히 심한 어르신은 저녁때가 다가오면 애들 밥 해줘야 되고 일하고 오는 사람 밥해 줘야 된다고 마음이 바쁘다. 집에 가기 위해 펄렁한 몸빼바지 양 가랑이 끝을 묶어 옷과 모든 생활 용품들을 탱탱하게 넣고 허리춤을 꽁꽁 야무지게도 묶었다. 양갈래로 어깨에 딱 걸치고는 집에 가야 된다고 출입문에서 닫힌 문을 두드리며 안절부절 불안해 못 산다.
"여기가 어디냐"라고 하루에도 몇 번씩 묻고 또 묻는다.
"내가 왜 여기 있느냐고 할 일이 많은데”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집을 못 찾겠다."라고 그러실 때마다 안타깝다.
젊을 때 열심히 살아온 만큼 노후에는 편안하고 여유로운 시간을 누릴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밤이고 낮이고 화장실만 가면 피부가 온전하지 않을 정도로 씻고 또 씻는 반복행동에 조용한 밤 수압 센 물소리는 여러 사람 수면을 방해한다. 머리를 굴리다 생각해낸 것이 어르신의 한국어 실력을 활용해 보는 것이다. '수도 고장입니다 조심하세요.'를 유성매직으로 A4 용지에 굵게 적었다. 수도꼭지가 보이지 않게 매달았다. 참 신기하게도 눈으로 읽고 머리로 이해했는지 그냥 돌아섰다. 몇 번을 또다시 읽어도 새로운 내용으로 이해했으리라. 하룻밤만이라도 여러 사람이 조용히 지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지.
하루에도 몇 번씩 오칸 두줄 배기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옷 보따리를 꽁꽁 묶어 챙겨 들고 나서지만 어르신이 돌아갈 283번지는 이미 다른 사람 손으로 넘어가고 없다는 소식이다. 어르신 평생의 추억과 손때 묻은 그 집은 회복이 불가능한 안주인의 치매악화로 이미 정리되고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이 더 안타깝다.
어르신의 생각 속에서 떠날 줄 모르는 “오칸 두줄 배기” 대궐 같은 그 집은 마음속의 궁전으로 간직해 주세요. 지금 이 순간 이 현실을 몸과 마음이 가장 편하게 쉴 수 있는 안식처로 받아들여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오 칸 두 줄 배기 기와집은 이제 그만 잊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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