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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민크루 Nov 01. 2020

땅콩 항공 아니고, 물병 크루즈


오전부터 늘어지게 줄 서있던 승객들을 응대한 프런트 데스크. 이후 찾아온 동료들과의 수다 시간, 그 꿀 같은 막간의 시간을 방해하러 오는 것인가.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썩 좋지 않은 남성 승객이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데스크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160cm 되어 보이는 신장, 그런데 90kg 정도는 되어 보이는 체중, 널찍하고 어두운 낯빛의 얼굴, 뜨고 오는지 감고 오는지 확인 불가한 작은 눈, 45년 넘게 웃어본 적 없는 것 같은 입꼬리, 10년은 더 늙어 보이게 하는 머리 한가운데의 고속도로, 집에 세탁기가 없는지 싶은 어두운 색의 꾸깃한 티셔츠와 반 바지, 객실에 비치된 슬리퍼.


멀리서 보나 가까이서 보나 피할 수 있다면 피해야만 하는 느낌을 팍팍 뿜고 오는 40대 중후반, 어쩌면 50대일지도 모르는 이 남성. 하필이면 일본인이었다. 일본어로 응대할 수 있는 리셉셔니스트는 당시 나 혼자였으니 나에게는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재빨리 스캔한 뒤, 더 웃어드리자 하는 마음으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무엇을 도와...”


"왜 내 물병을 가져가는 거야!!!! 찾아내 당장!!!!"


데스크를 탁탁 치면서 내 말을 끊더니, 잔뜩 흥분되어 떨리는 몸동작과 함께 침을 튀기며 다짜고짜 언성을 높였다. 역시 내 예감이 맞았다. 똥 밟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피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니, 나는 어떤 상황인지 자세히 여쭈었다. 승객은 화를 내고 삿대질하며 장황하게 설명을 했다. 하지만 컴플레인 내용은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었다. 승객이 일본에서부터 가져왔다는 3병의 비어있는 생수 500ml 페트병을 커피 테이블에 올려놓았는데, 우리가 그것을 가져가 버려서 화가 났고 그것을 찾아오라는 것이었다.


보통은 빈 페트병을 안 버렸다고 화를 내면 모를까 버렸다고 화를 내지는 않는다. 나는 내 귀가 의심스러워 다시 한번 내용을 확인했으나,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어처구니없는 내용과 게다가 내가 한 일도 아닌 것에 대해 사과하기 싫었지만, 승객분께서 불쾌함을 느끼셨다니 죄송하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 객실 청소 담당인 하우스키핑 스튜어디스가 빈 페트병이니 정리해드려도 된다고 오해를 하고 객실을 깨끗이 해드린 것으로 생각된다고 설명했다. 승객은 막무가내로 다 듣고 싶지 않다며, 욕실에서 사용하기 위해 집에서부터 일부러 가져왔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장황하게 늘어놓으며 계속하여 소리를 질러댔다.


쓰레기라고 간주하고 버린 페트병이 크리스탈 꽃병을 관리하듯 멀쩡히 있을 가능성은 없다. 쓰레기장에 있는 수많은 페트병 중에 이 승객의 것을 찾는 것은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다. 설사 찾았고 깨끗하다고 해도 쓰레기 더미에서 나온 것을 승객에게 돌려드릴 수는 없다. 이 모든 뻔한 내용을 하우스키핑 부서에 확인하러 연락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고 욕만 먹을 상황이다. 바쁘다며 상대도 안 해줄 것이 불 보듯 뻔한 내용인 것이다. 그렇지만 데스크 건너편에는 이 승객이 잘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나를 째려보며 삿대질을 하고 소리를 질러대는 중이다. 주변에서 동료나 매니저가 도와주고 싶어도 말을 못 알아들으니 끼어들 수도 없다.


도대체 이 페트병을 어떻게 찾아야 하나 방도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도 일단은 뭐라도 해보려고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욕먹을 각오하고 하우스키핑 슈퍼바이저에게 전화했다. 하필이면 해당 객실 영역 담당이 다들 부딪히기 싫어하는 40대 중반의 러시안 미스 드라마 퀸 크리스티나였다. 상황 설명을 했지만 역시 비협조적이었고 욕만 먹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승객에게는 내가 하는 질문과 나의 추임새만 들리고 그녀의 욕은 안 들린다. 게다가 영어로 말하고 있으니 알아듣지도 못할 것이다. 나는 방도가 떠오를 때까지 어느 정도 시간을 끌은 뒤 전화를 끊었다.


일단은 승객에게 역시나 객실 청소 스튜어디스가 정리한 듯하며, 페트병을 찾아서 돌려드리는 것은 위생상의 문제로 힘들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리고는 동일한 페트병은 아니지만, 괜찮으시다면 선내에서 판매하고 있는 500ml 생수를 3병 객실로 보내드릴 터이니 그것으로 대체하기를 부탁드렸다. 높았던 언성은 어느 정도 낮아졌지만, 여전히 삿대질을 하며 나보고 책임지고 그렇게 하라며, 기다려도 갖고 오지 않으면 다시 내려오겠다 하고는 사라졌다.


프런트 데스크에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크고 작은 컴플레인을 응대한다. 내용도 가지 각각이다. 모든 컴플레인은 처리 후에 문서화시킨다. 승객과 해당 노선 동안의 히스토리로서 문서화하여, 선내 팀과 매니지먼트, 본사의 담당 부서와도 공유하는 것이다. 물론 이번 건에 대해서도 보고서를 작성했다. 보고서를 벌써 읽은 동료들은, 업무 후 맥주를 마시는 자리에서 진짜 어이없다며 결국 물을 사 마시기 싫었던 거 아니냐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보고서를 작성할 때, 승객이 크루즈를 위해 얼마나 지불했는지 찾아볼 때가 있다. 이 승객은 하루당 10만 원 정도밖에 내지 않고 온 승객이었다. 스위트 객실에 하루당 몇백만 원을 지불하고 오는 승객이 있는가 하면, 해당 국가의 여행사에서 잔뜩 잡아 놓고 팔지 못한 객실을 막바지에 헐값에 팔아버리는 경우도 있다. 일본 크루즈의 경우가 그러했다. 그래서 다른 크루즈 노선과는 다르게 승객 수준의 편차가 너무나도 심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내가 없는 시간에 그 승객이 와서 물병이 없어졌다는 식의 컴플레인을 내 동료에게 또 했다는 것이었다. ‘물병 승객’은 이미 우리 팀이 모두 알고 있었다. 동료는 얼마 전 응대했던 수민에게서 세 물병을 객실로 보내드렸다고 들었는데 그것이 도착하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또 없어졌다는 것인지에 대해 질문했다고 했다. 그러자 우물쭈물 대며 사라졌다는 것이다. 동료의 우스갯소리가 맞는듯했다. 물을 사 마시기 싫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천 원 남짓하는 생수에 돈을 아끼는 말도 안 되게 고급스럽지 못한 사람도 럭셔리 크루즈에 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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