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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민크루 Nov 01. 2020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승무원 975명의 선상 격리생활


3월 14일 오후 2시경, 캡틴으로부터 스피커를 통한 선내 방송이 있었다. 3월 15일 이후의 크루즈가 코로나 팬데믹 사태로 인해 취소되었으니, 내일 시드니에서 모든 승객은 하선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앞으로 나는 언제 어떻게 내릴 수 있는 건지, 이 배가 어디를 가는 건지, 회사가 당분간 운영 중지를 하게 되는 건지, 그렇게 된다면 나는 언제 다시 일을 할 수 있는 건지, 내려서 다른 일을 한다고 해도 이런 상황에는 쉽지 않을 텐데 경력이 단절되는 건지 등, 머릿속이 복잡했다. 하지만 걱정에 잠겨 있을 수 있는 시간은 단 1초도 없었다. 체크아웃 전날인지라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끊임없이 승객이 줄 섰고, 게다가 연속하여 크루징 할 예정이었던 승객의 문의 및 컴플레인 때문에 평소보다도 훨씬 더 많이 바쁘고 빠르게 지쳐가고 있을 뿐이었다.


취소된 크루징에 대해서 어떻게 보상할 것인지 재촉해 오는 승객에게는, 모든 비용은 100% 환불될 것이며, 추후 큐나드를 이용할 경우에 이번 크루징을 위해 지불한 금액의 50%에 해당하는 선상 크레딧을 제공할 것이라고 했다. 동의하고 돌아가는 승객이 있는가 하면, 그러면 언제 어떻게 환불할 것이냐고 묻는 승객도 있었다. 내 말을 믿을 수가 없으니 매니저를 부르라는 승객도 있었다. 매니저가 나와서 같은 답을 하면 동의하고 돌아가는 승객도 있는가 하면, 그래도 믿을 수 없다고 서면을 요구하는 승객도 있었다.


귀국 교통편에 대해 물어오는 승객이 굉장히 많았다. 비행기 티켓을 수배해야 하는 경우인데, 이 일은 본래 선상에서 하는 일이 아니라 본사에 담당 부서가 따로 있다. 우리는 그 다리 역할을 하는 것이다. 승객에게 어느 공항으로 가야 하는지를 물은 후, 본사 담당 부서에서 내일 비행기 혹은 최대한 빠른 날짜로 예약한 후 연락이 올 테니 기다려 주시면 방으로 연락드리겠다고 대처했다. 동의하고 고맙다며 돌아가는 승객이 있는가 하면, 그러면 이 항공사가 좋다든지, 비즈니스 클래스만 탄다든지, 밤 비행기는 싫다든지, 지금 당장 예약하라고 소리를 지른다든지, 내 말을 믿을 수가 없으니 매니저를 부르라는 승객도 있었다.


전 세계적인 상황 및 짧은 시간 내에 500여 명의 요구를 처리해야 하는 상황을 상식선에서 예측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승객은 항상 꼭 있기 마련이다.


그중에는 긴장감과 피로로 굳어져 가는 얼굴에 다시 웃을 수 있는 힘을 주는, 배려의 마음이 고마워서 울컥하게 하는 승객도 있었다. 승객 입장에서는 알아서 어련히 다 대처해줄 테니 기다리기만 하면 되지만, 우리는 보기에 너무 안쓰럽다며 힘내라고 초콜렛을 사서 일부러 다시 긴 줄에서 기다려 준 승객. 국적을 묻고는 가족이랑 친구 걱정만 해도 답답하고 힘들 텐데 집에도 못 가고 안쓰럽다며 위로해 주는 승객. 승객이야 내리면 그만이지만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냐며 걱정해 주는 승객. 데스크 앞에서 우리를 향해 힘내라며 힘껏 소리쳐 응원해 준 단골 승객 미스 돌리 할머니. 그렇게 고마운 승객도 있었다.


그중에는 스스로 굉장히 적절하고 현명한 조치를 하는 승객도 있었다. 회사에서 많은 인원을 처리하기 힘들 것 같으니 본인이 알아서 변경하겠다며, 나중에 비용 청구할 수 있는 연락처를 요구하고, 대신 그로 인해 발생되는 인터넷 비용만 먼저 선상에서 부담해 달라는 경우였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각자의 자리에서 할 일을 하며, 새벽 3시경이 되어서야 비행기 티켓 및 공항 교통편, 호텔 숙박 등 자세한 내용과 시간을 기재한 편지를 방문 밑으로 하나하나 집어넣을 수 있었다.


그중에는 선내 방송을 했는데도, 방으로 전화를 했는데도, 서면을 통해 알렸는데도 불구하고, 밤중에도 나타나지 않은 승객도 있었다. 해는 저물어 갔고 배는 시드니에 가까워져 갔다. 정박함과 동시에 전승객 하선에 대한 방송이 있었다. 밤 중에도 나타나지 않았던 몇 승객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승객. 강제 하선이라니 말도 안 된다며 캡틴을 부르라는 승객. 1시간 동안 토하는 화를 들어주며 비행기 티켓을 현장에서 예약해야 했던 승객. 삿대질과 욕을 들으며 호텔행 버스로 안내해야 했던 승객. 내릴 수 없다며 카펫 위에 누워버려서 시큐리티까지 출동하여 긴 시간 동안 설득하여 겨우 하선시킬 수 있었던 마지막 2명의 70대 노부부 영국인 승객. 그 어떤 승객도 쉬운 승객은 없었다.


그 어떤 승객이든 모두 일단 내리게 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임무였고, 3월 15일 오전 11시경 NO 승객 ONLY 승무원이 되었다.


이후 시드니에서 쫓겨난 우리는 3월 19일 밤 10시경이 되어서야 겨우 호주 글래드스톤 근처에서 닻을 내릴 수 있었다. 다음날 오후 12시경, 근방에 같은 처지인 배가 30척은 된다며, 아직 우리를 받아줄 곳을 찾지 못했고 당분간 글래드스톤에 머물 것이라는 선내 방송이 있었다.


그렇게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크루즈 승무원 975명의 선상 격리생활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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