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민크루 Nov 01. 2020

다 잡을 수 있는 두 마리 토끼


크루즈 승무원의 가장 매력적인 특권을 뽑자면, 말할 것 없이 쇼어 리브. 배가 항구에 정박해 있는 시간과 쉬는 시간이 겹치면, 육지 밟으러 뭐라도 구경하러 현지 음식 먹으러 쇼핑하러 무조건 나간다.


Shore Leave: 본래 해군 및 선원의 상륙 허가라는 뜻으로, 크루즈에서는 승무원들이 쉬는 시간 중 기항지에 외출하는 것을 칭한다.


쉬는 시간은 부서와 직책에 따라 상이하고, 상황에 따라서는 특별히 긴 쉬는 시간을 신청해서 더 여유 있게 즐길 수도 있다. 단, 하루에 한가할 때는 6.5시간에서 바쁠 때는 14시간까지도 일하는 것을 고려하면, 주어진 시간을 깨알같이 활용해야 한다는 제한은 있다.


이런 굉장한 특권을 유난히도 누리기 힘든 항구가 있는데, 바로 턴어라운드 포트. 이런 날에는 면세법 등에 의거하여 아예 운영을 할 수 없는 면세점 및 카지노 부서 등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부서가 항차 중에 가장 바쁜 날이다. 체크아웃과 체크인 전후가 가장 바쁜 프런트 오피스에게는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일하고 싶지 않은 날이자, 감정노동의 정점을 맛보는 묘하게도 중독성 있는 날이기도 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항구에 접안하는 날에는 무조건 최대한 길게 나갔다 오고 싶은 건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승무원이 바라는 바이다.


Turnaround: 선박 및 항공기가 화물 또는 승객을 내리고 다시 타게 하는 이라는 뜻으로,
Turnaround Port: 즉 항로를 시작하는 첫 항구로서, 기존 승객의 체크아웃을 끝내고, 새로운 승객을 위한 준비를 한 후, 바로 체크인을 시작하는 매우 바쁜 항구이다.


나는 지난해 멜버른에서 매니저에게 특별히 요청하여 긴 쉬는 시간을 받았다. 멜버른에 사는 친구 정아와 몇 년 만에 만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긴 시간 동안 나갔다 올 수 있으니 땡잡은 날이다? 역시 크루즈 승무원은 돈 받으며 여행하는 직업이다? 그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일은 일대로, 쇼어 리브는 쇼어 리브대로, 할거 다 하는 등골 빠지는 날이다.


턴어라운드 포트에서 쇼어 리브를 충분히 할 수 있는 쉬는 시간을 넣으려면 어떤 업무 스케줄을 짜야할까? 멜버른 항구에 입항하는 시간은 07:00 am, 출항하는 시간은 18:00 pm. 바쁜 날이니 10시간 근무로 가정해보자. 06:30 am에 출근해서 체크아웃하는 승객들을 다 응대한 후에, 재정비하면서 다음 항차를 위한 준비가 어느 정도 진행되고 있는 시간대인 10:30 am에 쉬는 시간이 시작된다. 이렇게 오전 근무 시간은 4시간이다.


이후 누구보다 빠른 속도로 방으로 돌아가, 미리 챙겨놓은 사복으로 갈아입고, 갱웨이로 날아간다. 여기서 혹시라도 체크아웃이 지연되어서 다들 바쁘니까 눈치가 보여 못 나가고 있다거나, 승무원 쇼어 리브가 아직 개시되지 않았다면, 굉장한 절망감을 맛볼 수 있다. 그렇게 내린 육지에서 무엇을 하든 최대한 즐긴다. 쇼어 리브 시간은 아무리 길어도 항상 부족하다고 느끼기 마련이니 불평 말고 그저 즐길 수 있는 모든 것을 즐기면 된다. 즐겼으면 이제는 배로 돌아와서 다시 근무 준비다. 이렇게 쉬는 시간은 6시간이다.


Gangway : 배와 육지 사이를 이어놓은 통로라는 뜻으로, 배의 출입구이다.


다시 근무를 시작하는 시간은 16:30 pm. 출항 전 승객 비상훈련을 하고 평균 2천 명의 체크인을 정신없이 하다 보면, 크루 메스가 닫는 시간이다. 문 닫기 전에 저녁 식사를 하러 가서는, 내 승객이 더 미쳤네 니 승객이 더 웃기네 이러고 수다를 떨며 감정노동으로 쌓인 피로를 떨쳐낸다. 너무 지쳐서 그나마도 못할 때는, 입은 먹는 데에만 집중한다. 수다도 사치다. 이렇게 숨 돌리는 시간은 0.5시간이다. 다시 자리로 돌아가서 첫날에 빠질 수 없는 질문 폭탄, 요구 폭탄, 진상 폭탄, 현금 폭탄, 보고서 폭탄을 죄다 맨몸으로 받아내고 나면, 드디어 해방의 시간 23:00 pm. 이렇게 저녁 근무 시간은 6시간이다.


Crew Mess : 승무원 전용 식당


근무 10시간 + 휴식 시간 6.5시간 = 총 16.5시간에 전후 출근 및 취침 준비 2시간을 더하면 총 18.5시간이다. 24시간 중 5.5시간 만을 제외한 18.5시간 동안, 나의 심신을 풀가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땡잡은 날은 아니라는 것이다. 턴어라운드 포트는 특히 더 그렇지만 모든 포트에서의 쇼어 리브는, 부족한 수면과 폭탄 맞이 대잔치 시간에만 일해야 하는 피로를 감내하여야만 쟁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크루즈 승무원은 마음만 먹으면 열심히 일하고 즐겁게 여행할 수 있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는 굉장히 특별한 환경에 있을 뿐이다.


이전 15화 가고 있어도 가고 싶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