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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자몽 Oct 18. 2024

장롱면허로 삶을 운전하다 (하)

딩동댕! 나의 실패이력서(10)

과정을 즐겨라


두 번째 떨어지고 세 번째 시험준비하던 날 아침,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또 떨어질지도 모른다. 운전도 잘 못하고, 순간 대처가 잘 안 되는 데다가 감정 조절도 못한다. 영어도 못하며, 시험관 잘못 만나면 욕이나 먹는 거 쉽지 않다. 그래도 매일 시험 보러 갈 수 있고, 시간도 되니 하는 데까지 해보자 싶었다. 과정도 결과만큼 중요하지 않나? 이왕 하는 거 즐겁게 하자.


즐거울 리가 없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웃으면서 시험 보러 가서 시원하게 세 번째 시험을 떨어졌다. 시험관한테 들은 대로 연습을 하고 네 번째 시험에서 합격을 할 수 있었다. 합격하면서, 고마웠다. 웃으면서 과정에 집중하니까 결과도 달라지는 거구나. 그래. 뭘 하든 이왕 하는 거 기쁘게 하자 싶었다.


그때부터였을 거다.

혹시 생각처럼 잘 안 되더라도 너무 심하게 좌절하지 말고, 내일 또 잘하면 되지. 하고 금방 체념하고 잊기 시작한 게.. 그러고 나면 몸이 진짜 가벼워졌다. 그래도 하는 데까지 한 건데 결과가 나쁜 건 할 수 없지 않나?라고 격려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래서 운전면허증이 그냥 면허증이 아니었다. 나름 그때부터 조금 다르게 살기 시작했으니까. 면허증을 따고 얼마 안 돼서, 기적적으로 비자 서포트를 해줄 다음 회사를 구해서 아예 주(state)를 떠나게 되었다. 다음 회사로 옮긴 후에도 다시 고민하는 삶이 시작되었지만...





삶을 운전하다


주를 옮겨 이사를 하는 바람에 면허증을 우편으로 보내달라고 3개월 동안 계속 전화를 해야 했다. 미국 관공서에서의 일처리란, 보통 그렇게 뒷목을 잡게 했다. 관공서뿐만 아니라 다른 데에도 더 심한 것들이 정말 많았다.


어렵사리 받은 면허증 덕분에 남편이 잠시 한국 들어와 있는 동안 나 혼자 운전을 할 수 있었다. 내비게이션이 없이 지도만 보고 운전하던 시절이라, 남편이 한국 오면서 손으로 지도 6장을 그려줬다. 그걸 보며 운전하고 다녔다. 이외의 장소는 다니지 않았다.


직접 운전대를 잡으니, 조수석에 앉아 다닐 때 모르던 어려움을 경험할 수 있었다. 누군가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결정하고 움직이는 삶을 그때서야 처음으로 안 셈이다. 쏟아지는 햇살에도 가야 하고, 비 오고 물 튀는 날에도 꿋꿋하게 가야 하며 언제 끼어들지, 말지도 판단해야 했다. 기름도 스스로 잘 넣어야 했고(셀프 주유다), 자동 세차기계에 잘 들어갔다 나와야 했다.


스스로 뭐든지 해야 하는 삶이라니..

나는 그동안 대체 뭘, 어떻게 산건가. 정말 많은 생각을 했다. 면허증이 가져다준 깨달음이 참 여러 가지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남편이 미국으로 돌아와서 7년 반 가까운 미국 생활을 정리할 때까지 역시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제일 기억나는 게 '혼자 6개월 지내기'였다.


한국에 돌아와서 5만 원 주고 미국면허증을 한국면허증으로 바꿨다. 바꾼 후에는 신분증 대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처음에 몇 번 렌터카 운전하다가 다시 목덜미 몇 번 잡힐뻔하고는 포기했다. 그래서 나의 면허증은 장롱면허가 됐다.


그래도 면허증 덕분에 드라마틱하게 벌어졌던 일들을 잊을 수가 없다. 어느 날 문득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면, 앞뒤 맥락 따지고 득실 고려하지 말고 그냥 해보기로 했다. 비록 실패하더라도 의지가 생긴 것을 응원하기로 했다. 과정도 결과만큼이나 소중하니까. 과정을 즐기기로 했다.


앞으로 무얼 하든 즐겁게 잘 살았으면 좋겠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 나오듯, 인생은 박스 안에 든 초콜릿 같다. 무엇을 꺼내게 될지 모르겠지만, 이왕이면 기쁜 얼굴로 웃으며 맞이했으면 좋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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