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아갔던 나 자신을 반성하고, 외노자(외국인 노동자)로서 하루하루 잘 살아보기로 했다. 회사 끝나고 영어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시험용 영어 말고, 먹고살기 위한 기초적인 영어 공부를 했다. 주말에도 따로 공부를 했다. 공부를 했다고 아주 잘하게 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나름 공부가 활력이 됐다.
남편한테 의지해서 나는 말을 잘 안 했는데, 남편이 한국으로 돌아가서 6개월간 떨어져 있는 동안 혼자 살면서 미안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내가 하자. 싶어서 더듬거리면서 말을 했다. 못하는 거 창피한 거 아니다. 무시당하는 거 아니고, 괜찮다 다독이며 말하기 시작했다. 굉장히 유창해진건 아니지만, 약간 용감해진 것 같다. 귀국 후 영어 쓸 일이 없다 보니, 이제는 다 까먹었지만 '용기' 하나는 마음에 새기게 됐다.
용기 말고 얻게 된 교훈 중에 하나는 바로 '질문하기'다. 모르는 것, 애매한 건 물어보기. 물어본다고 혼나지 않는다. 단 물어봐도 해결되지 않는 경우가 있지만.. 일단 애매하면 물어본다. 잘 물어보기는 별개의 문제지만, 예전에 비해 물어보게 됐다.
내가 참 아무것도 아니었구나를 알게 됐다. 전에 한참 승승장구 잘 나갈 때는, 내가 뭐라도 된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제 아는 사람도 하나도 없고, 영어도 못하고, 환경도 낯설고 모르는 것 투성이인 곳에 살다 보니 진짜 내가 아무것도 아니었구나를 깨달았다. 뭘 위해, 뭣 때문에 그렇게 아등바등 살았을까. 허무하기도 했다. 받은 것 많고 살기 좋은 내 나라에서 살 때는 안 보이던 것들을 많이 깨달을 수 있었다.
미국 가서 일한다고 다 실리콘밸리에 가서 내놓으라 하는 기업에서 일하는 게 아니라는 건 너무 일찍 깨달았다. 비자나 영주권, 시민권 등등이 걸려 있어서 그런 거를 다 보조해 줄 수 있을 정도의 천재나 재능이나 기술이 아니면 쉽지가 않다. 영어를 아주 잘했더라면? 그래도 환경이 문제라 쉽지 않았겠다.
그래도 좋은 건 하나 있었다. 퇴근이 보장된 삶이었다. 6시나 늦어도 7시면 퇴근이고, 이후에는 내 삶이 있었다. 가족들의 시간. 그때는 아이가 없었으니 저녁 6시부터 아침 출근 때까지 둘만 있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처음 1년은 참 많이 싸웠다. 몇 년 치 싸울걸 다 싸운 것 같았다. 미국에서의 첫 번째 회사를 그만두고, 다음 회사 옮길 때까지 줄어드는 잔고 때문에 힘들고, 재취업은 쉽지 않고 등등으로 고통을 함께 겪었다. 재취업하고도 미국에 남을지 말지 때문에도 고민 많이 했다. 그런 방황의 시간을 잘 넘기게 됐다. 그것도 한때였는데, 당시에는 크게 느껴졌다.
어렵게 남기로 결정하고 살면서도 내내 불안했던 건, 비자니 영주권이니 하는 신분 문제도 있었지만 불투명한 미래 때문이었다. 꽤 오래 걸린다는 영주권을 받게 되더라도 우리는 이후에 어떻게 될까? 막막했다. 유학생, 박사과정이나 교환학생으로 오신 분이나 회사나 학교 관련해서 잠시 오신 분들이 때 되어 떠나시는 거 보면 부럽기도 했다. 그래도 늘 불안해하면서도 그래도 점점 생활이 익숙해져 갔다.
당시에는 (미국에서) 스마트폰이 대중화되기 전이고, 미국 인터넷 속도는 무척 느리며(전화 모뎀으로 접속) 하여 인터넷도 딱 집에 와서 잠깐 보는 정도였다. 그래서 우리는 많이 걷고 이야기하고, 걱정하며, 공부도 하고 명상도 하는 좋은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인생의 황금기 30대를 그렇게 보냈다. 이상과 현실은 참 많이 다른 것 같다.
다시 돌아와 보니 보이는 것들
그대로 있다가 영주권을 받고, 계속 미국에 있게 되나? 했는데 회사가 어려워져 문을 닫게 되고, 결국 우리도 짐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오게 됐다. 마흔에. 사과상자 8개 가지고.. 망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맨땅에 헤딩하듯 다시 시작해야 했다. 할 수 없지만,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 했다.
막상 돌아와 보니 이전에 몰랐던 것들, 안 보였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남의 눈을 참 많이 의식하고 살았던 것 같다. 예전에는 잘 나가야 되고, 잘 돼야 되고. 남보다 앞서야 하고 그런 것에 목숨을 걸었던 것 같다. 그런 것보다 내가 중요한데 내 생각은 별로 안 했던 것 같다. 내가 지금 어떤지, 그리고 하루를 어떻게 살고 있는지.. 생각보다 내가 나를 돌아보지 않고, 남들 눈에 어떻게 보일 까만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한국은 빠르고, 편하고, 살기 좋은 곳이다. 여러 가지 불편한 것, 안 좋은 것이 분명 있겠지만.. 말이 통하고 내가 나고 자란 곳이라 어떻게든 살 수가 있다. 아프면 바로 병원에 갈 수 있고, 적절한 약을 구해 먹으면 된다. 좋은 게 많은데, 정작 사람들은 잘 모르는 것 같다. 분노에 가득 차 있고, 우울하고 슬픈 사람들이 많아 보였다. 인종차별은 없지만(아주 없다고 할 수는 없었다. 대한민국이 굉장히 많이 바뀌고 있었다), 보이는 것에 굉장히 민감하고 중요시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어쨌든...
나는 오늘 하루를 감사한다. 하루를 감사하며, 나쁜 것은 잘 떠나보내고, 좋은 생각은 한번 더 하면서 살려고 한다. 어디에 있느냐보다 더 중요한 건, 내가 어떻게 사느냐인 것을 이제는 알 것 같다. 버티고, 이겨내는 것 그리고 잘 적응하는 것도 참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