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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이제는 준비 완료2
08화
4-7. 배고픈 나를 믿으면 안 된다.
by
영화하는 이모씨
Jul 22.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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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이모가 말하는 '배고프다'는 히딩크 감독님의
hungry와 같은 것이 아니다.
히딩크 감독님이 말씀하신 "I'm still hungry."는
'열정', '더 큰 목적'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멋있는 작문이었지만
내가 말하는 배고프다는 정말로 배가 고픈, 음식물 섭취가 상당히 지연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배고픈 상태에 나를 믿으면 안 된다.
지금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게 아니다. 나는 아주 진지하다.
우리는 어떤 결정을 하기 이전에, 그것이 중요할수록 신중해야 하고
신중하기 위해 어떤 노력이라도 해야 하는데
이모는 그 첫 번째가 배를 채우는 일이라고 정말! 생각한다.
우리 딸들이 나에게 어떤 결정에 동의를 구할 때가 있다.
예를 들면 오늘 학원에 안 가면 안되냐거나
오늘 어떤 사람 때문에 화가 나 짜증이 나니 같이 화를 내줄 수 있는지 묻는다.
사실 이건
허락
의 문장형태를 띠고 있으나
이미 자신은 결정을 했으니 어서
동의
를 하여 자신의 불편한 양심을 달래 달라는 문장구사법이다.
이런 경우 허락이 필요한 것이라면 안된다는 의견에 순응하기도 하지만
동의가 필요하기 때문에 왜 자기가 이렇게 하려고 하는지
설득
의 단계로 넘어간다.
동의를 얻고야 말겠다는 것이다.
이 프로세스를 빤히 아는 나는 아이들에게 이유를 묻지도 않고 그렇다고 동의도 하지 않는다.
다만 오늘 하루 먹은 걸 묻는다.
그러면 점심도 대충 먹었거나 간식도 먹기 전일 때가 태반이다.
그러면 나는 무조건 좋아하는 간식을 먹고 다시 이야기하라고 한다.
그러면 10에 9는 다시 전화가 오지 않는다. 먹고 나면 짜증이던 피로든 어지간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간혹 먹고서도 학원에 안 가고 싶다고 하면 나는 이유도 묻지 않고 집으로 오라고 한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아이가 학원에 갈 수 있는 상태인지 아닌지 나는 알 길이 없다.
하루종일 어떤 사람들과 어떤 일을 겪었는지 모두 알 수도 없거니와 아이의 감정적 피로도를 가늠할 수도 없다. 대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배고픈 아이를 의심하는 것과 배부른 아이의 판단을 신뢰하는 것뿐이다.
나는 오랜 기간 작업을 하면서
작가들에게 섭식은 아주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해 왔다.
故
이외수작가님은 집필을 시작하면 생라면만 드시며 자리를 뜨지 않으셨다는 인터뷰를 본적이 있다.
그만큼 작업에 집중하셨다는 의미일 것인데 또 다른 의미로
먹지 않으면 예민해지고
그 예민함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튀어 올라 집필에 도움이 되곤 한다는 데에 나도 동의를 하므로
좋은 방법(?)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것은 제법 의미 있는 사람의 동의가 구해진 트리트먼트 집필이 끝난 이후에 적용해 봄직한 방법일 수는 있으나 그전에는 반대하고 싶다.
여기서 제법 의미 있는 사람이란, 계약의 파워를 가진 자, 또는 아주 존경하는 스승, 또는 믿어 의심치 않은 능력자 정도일 것이다.
그런 사람들의 동의가 구해진 트리트먼트를 가지고 드디어 집필이라는 단계로 접어들었을 때, 그때나 해보라는 말이다.
그 전에는 아니다. 고로 지금 이모가 설명하고 있는 트리트먼트 작업의 단계에서는 항상 배불러야 한다.
항상 든든히, 건강히, 자~알! 먹어야 한다.
실제로 작가들은 트리트먼트 작업 중에 두 가지 종류에 수렁을 만나게 되는데
하나는 자기 비하이고 하나는 과잉몰입이다.
트리트먼트를 쓰다 보면 작가들이 자기 한계를 많이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실제로 스토리의 얼개를 다 잡는 일이니 어떤 면에서 실제 집필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이런 자기 비하는 자연스럽게 우울모드로 스스로를 전환하고 자격지심의 길로 발을 들여놓는다.
아니면 지나치게 주인공의 감정과 상황에 물입 하며 주인공만큼 지쳐가는 경우다.
로맨틱 코미디나 멜로, 휴먼 드라마 장르를 작업할 때는 별문제가 안될 수 있는데 공포, 스릴러, 하드고어 or 하드코어 장르물을 작업할 때 이 수렁에 빠지면 주인공처럼 작가도 같이 말라 비틀어간다.
그러니 먹어야 한다.
가능하면 따듯하고 부드러운 음식을 천천히 먹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여의치 않으면 편의점 샌드위치라도 밀어 넣어야 한다. 그러면 최소한 속이 불편할 수는 있으나 더부룩한 속을 신경 쓰느라 자기 비하는 피할 수 있다.
불편한 내 뱃속을 살피느라 주인공에게서 빠져나올 수 있다.
나는 가끔 길을 가다가 '도를 아십니까'를 만난다.
그런데 그때의 나는 항상 공통점이 있다.
같은 길을 지나도 그런 사람들이 말을 걸어올 때는 항상 피곤이 한도초과일 때다.
그 사람들도 대번에 알아보는 것이다.
몸이 약할 때를, 그래서 마음이 약할 때를.
나의 스토리에서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한다면.
펜이 아니라 일단 숟가락을 들어야 한다.
컴퓨터가 아니라 가스레인지를 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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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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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4-5-1. 재미는 없고 도움은 되는 실전연습
07
4-6. 지독히 유혹적으로
08
4-7. 배고픈 나를 믿으면 안 된다.
09
4-8. 정확한 이정표는 경제적이고 안전하다.
10
4-9. 꽃보다 좋은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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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엄마, 아내, 교수, 그리고 00이 이모. 이 모든 이름으로 살아가는 나는 無名무명감독 아니고, 多名다명감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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