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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2. 해피하지않아도 해피하다.

by 영화하는 이모씨

수업시간이었다. 한 학생이 지난 학기에 만들었다는 단편영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한 고시생이 등장한다. 고시에 떨어진 그가 자살을 시도한다.
결국 목을 맨다. 그리고 생인지 사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꿈속으로 빠져들고 거기서 삶의 의지를 깨닫는다. 진정 살고자 하는 그는 단말마를 토해내며 눈을 뜬다.
그는 살았다.

학생은 해피엔딩의 아주 유쾌한 이야기라고 소개했다.

그런데 나는 그 말이 이상하게 들렸다.

해피엔딩?

나는 재차 확인했다.

나의 시큰둥한 반응에 학생은 ‘좀 뻔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자전적인 이야기를 꼭 한 번은 하고 싶었다.’ 이런 변을 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이야기가 뻔해서가 아니다. 해피엔딩이라고 해서다.

그 영화 속에 주인공은 그 학생 자신이었다.

그 학생은 영화과에 입학하기 전 법대출신으로 사법고시를 준비했었다.

그리고 사법고시 폐지를 목전에 본 마지막 시험에서 고배를 마셨다.

그 학생은 마지막 불합격을 알았을 그때의 막막함을 떠올리며 정말 지독한 시간이었다고 회상했었다. 떨어진 것도 서러운데 이제는 재도전의 기회조차 말살당한 고시생의 막막함을 그는 영화를 통해 쏟아내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 영화에서 주인공은 자살을 결심한다. 그런데 살아난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은 그의 욕망을 실현하는데 실패한 것이다.

그런데 이게 어찌 해피엔딩이란 말인가?

주인공이 원하던 것이 실패했는데?


그럼 죽었어야 해피엔딩이냐고 화를 내고 싶을 수 있지만 지금 나는 죽고 살고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완전히 절망한 그때의 자신을 위로하고 새롭게 출발하고자 하는 도약의 길 앞에 선보인 첫 작품에서 그는 여전히 실패하는 인물을 그려내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물론 작가가 선택한 주인공의 욕망이 아이러니하게도 ‘죽고 싶다’는 것이다 보니 아주 조심스럽지만 자고로 해피엔딩이란 무엇인가?

주인공이 그토록 원하는 것을 마침내! 이뤄내는 것이 해피엔딩이다.

그런데 주인공은 고시에서도 실패했고 이제는 자살에서도 실패했다.

그것이 어떻게 해피엔딩인가?

물론 사람이 살았으니 해피엔딩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삶의 의지까지 품게 되었다니 해피엔딩이다. 그런데 이런 오류들이 뒤엉킨 근본적인 원인은 작가스스로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잘 몰랐다고 밖에 이야기할 수 없다.


만약 그의 말대로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면,

그래서 그때의 자신에게 일종의 세리머니가 필요했던 거라면

죽음을 욕망하는 대신에 다른 것을 욕망했어야 한다. 그리고 그는 기꺼이 성취했어야 한다.

물론 처음에는 죽음을 욕망하는 듯 주인공 자신과 관객을 속일 수 있으나 금세 관객들에게(주인공은 뒤늦게 깨닫더라도) 진정한 욕망의 대상을 들켜야 하고 그 대상을 향해 달려갔어야 한다. 그리고 마침내 손에 넣었어야 그의 해. 피. 엔. 딩이 되었을 것이다.


만약 이 모든 일련의 과정이 머리 아프다면 해결방법은 간단하다.

자신의 영화를 새드 엔딩이라고 소개하면 된다.

나는 이런 오류들이 나오는 가장 큰 원인은 ‘피상적 사고방식’에 있다고 생각한다.

엄마는 당연히 자식을 사랑한다.

억울한 사람은 당연히 복수를 한다.

착한 사람은 당연히 복을 받는다.

얼핏 보면 말이 된다. 얼핏 보면 설득도 된다.


하지만 관객들은 자신의 돈과 시간을 들여 아무도 영화를 얼핏 보지 않는다.

작가 혼자만 얼핏 보고 ‘원래 그런 거다, 당연히 그런 거다’하면서 넘어가면 이야기는 붕 떠버린다. 아무도 공감하지 못하고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작가의 넋두리가 되는 것이다.

이 사실을 모르는 작가는 없지만 이야기를 쓰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피상적인 선택들을 한다.


‘피상적’의 반대말은 ‘본질적’이다라고 할 수 있다.

피상적이라는 말이 얼마나 작가에게 치명적인지 설명이 될 것이다.

작가란 자고로 인간 내면의 본질을 파고드는 사람이다.

사건을 단순 스케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을 자신만의 시선으로 파고들어 가 그 본질을 끄집어내는 사람이다. 그런데 피상적이라니..

피상적 사고방식이 진짜 무서운 이유는 시작의 겉모습은 본질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데 있다.

그런데 한번 발을 잘못들이면 완전히 다른 길로 가게 된다.

단순한 삼거리에서 우회전 한번 잘못했을 뿐인데 유턴 없는 고속도로에 올라타는 꼴이다.


앞서 말한 대로 배고픈 나에게 호텔뷔페는 최고의 해피엔딩 같지만 그것은 ‘푸짐한 음식들’이라는 겉모습은 같더라도 정말 나에게 필요한 그것과는 거리가 먼, 피상적인 것이다.


명심하자.

복수를 바라 달려오던 주인공에게 로또 1등 당첨이 해피엔딩일 수 없다.

<더글로리>에서 문동은이 로또 1등된다고 해피했을리가 만무하다.

나는 그 학생도 그 피상의 함정에 빠졌다고 생각한다.

‘죽으려던 사람이 사는 것 = 해피엔딩’이라는 피상적 공식이 그의 고민보다 앞서버린 것이다.


쓸데없는 말을 덧붙여보자면 나는 그 학생이 이 영화 안에서 스스로 떠나기로 마음먹었다면 그것을 맞이하도록 두었다면 어떨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물론 과제용 단편영화라는 전제가 있기에 가능한 소견이다.

그 학생은 성실하고 훌륭한 재주는 가졌음에도 과제를 해올 때 보면 조급한 마음에 휘둘리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이가 있기도 하고 실패하던 과거에서 벗어나 성취해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 그 조급함이 거뜬히 이해가 된다.

그렇지만 이야기꾼이 된다는 것은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조급하다고 빨라지는 것이 아니며 방향 없이 열심히만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과거에 실패했던 그때의 자신의 업보를 지금의 자신에게 뒤집어씌우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 과거의 자신은 돌아올 수 없는 요단강을 건너 보냈으면 좋겠다.

그리고 부디 다시는 만나지 말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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