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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 진짜 결말과 가짜 결말

by 영화하는 이모씨

해피엔딩 happy ending 이란 도대체 뭘까?

해피엔딩이란 말 그대로 행복한 결말이다. 우리가 아는 많은 이야기들이 해피엔딩인 이유는 사람들이 좋아하기 때문이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유는 사는 것이 해피엔딩이기 쉽지 않아서 이다.

내 인생에서는 주인공인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니까.


그래서 해피엔딩이 주를 이루는데 덕분에 가끔 볼 수 있는 새드엔딩은

그런대로 삶과 닮아 있거나 예상을 빗나가서 우리에게 그 나름의 즐거움을 준다.


그런데 작가들이 쉽게 놓치는 것이 있다.

과연‘행복한’ 주체가 누구냐는 문제이다.

관객일까? 주인공일까?


사실 둘 다 맞다. 주인공이 행복해지면 그를 따라가던 관객들이 덩달아 행복해지는 것이 당연지사니 말이다. 하지만 작가의 입장에서 해피엔딩을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정신 바짝 차리고 한번 따라가 보자!


한 남자가 일확천금을 꿈꾸며 은행털이를 결심한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한 여자를 만나고 돈보다 중요한 사랑의 가치를 깨닫는다.
남자는 은행 털기를 그만두고 여자에게 청혼을 한다. 두 사람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산다.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일까?


마지막에 주인공이 활짝 웃으며 행복한 웨딩마치를 올리는 장면을 봤으니 해피엔딩이라고 느낀다.

혹시라도 헛갈릴까 봐 기분 좋은 배경음악까지 더해지니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작가는 의심해야 한다.

이 이야기가 진짜 해피엔딩인지 말이다.

그리고 저 설명하기 어려운 ‘행복한’을 기어이 해석해 내야 한다.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뭉개면 작품도 뭉개진다.


이걸 해석해 내기 위해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내가 배가 고프다고 한다면 나에게 가장 행복한 결말은 무엇일까?

어젯밤 기름진 안주에 술까지 곁들인 탓에 속이 안 좋다는 디테일이 더해진다면?

이런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찌개백반 한상이면 충분하다.

산해진미가 가득한 호텔 뷔페가 가장 큰 행복을 줄 것 같지만 사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건 정말 피상적인 접근이다.

속이 텅 비어 허기진 나에게는 기름지고 많은 음식보다 담백하고 소박한 밥상이 더 절실하다.

이해가 되었는가?

해피엔딩이란 이런 것이다.

호텔뷔페가 해피엔딩이 아니다. 백반 한상보다 호텔뷔페가 더 비싸고 더 푸짐하니 더 해피엔딩에 가까워 보이지만 이 이야기의 주인공을 이해하지 않은. 아무 주인공에게서나 볼 수 있는 피상적인 해피엔딩이다. 가짜 결말이란 말이다.


그렇다면 위에 박스 안 스토리의 주인공이 가장 행복한 결말이 뭘까?

그건 이야기를 관통하고 있는 주인공의 욕망이 실현되는 것이다. 그가 이야기가 흘러오는 내내 온몸과 온 마음을 다해 간절히 소망하던 것이 마침내!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 그것이 해피엔딩이다.

그래서 이 스토리는 해피엔딩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가 처음부터 욕망했던 것은 '경제적 풍요'다.

그가 '경제적 풍요'보다 훨씬 가치 있는 '진정한 사랑'을 얻었다고 우긴다고 해도 본질적으로 주인공은 잠시 상쇄되는 듯하지만 그의 욕망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저 실현의 이유를 잠시 잊었을 뿐이다.

그러니 언제고 다시 떠오른다면 그는 다시 은행털이를 나설 것이다.


진짜 결말은 주인공에게는 해피하나 관객에게는 해피하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때로는 결론만 떼어놓고 보면 행복하다고 할 수 없는 결말일 수 있다.

영화 <부산행>을 보자.

결국 부산으로 향하던 기차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

생존자는 임산부와 소녀, 세 사람뿐이다.

주인공인 공유가 죽었다. 주인공이 죽어도 슬픈데 공유다. 아이고, 대성통곡을 할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영화를 보고 아무도 새드 엔딩이라고 느끼지 않는다.

이상한 일이다. 우리가 영화를 보기 시작하면서부터 애정하게 된 수많은 캐릭터들이 다 죽어나갔는데 해피엔딩이라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물며 공유가 죽었는데도 말이다.


이유는 주인공인 석우(공유 분)의 욕망이 ‘딸을 부산에 무사히 데려다주겠다.’는 것이었고 그것이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석우는 자신이 살기를 욕망한 적이 없다.

그러니 그의 죽음은 그의 욕망이 실현되고 말고 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죽는다’는 사실은 슬픈 일이다. 절대 해피할 수 없다.

하지만 작가는 ‘죽는다’는 말에 매몰돼서는 안 된다.

이 이야기에서 ‘죽는다’는 1차원적인 죽는다가 아니다.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과정, 노력의 산물일 뿐이다.

그러므로 작가라면 죽음이라는 결과가 아니라 욕망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트리트먼트를 쓸 때 ‘죽는다’는 글자대신에 ‘희생한다’ 정도로 바꿔 쓸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작가 스스로 ‘죽는다’는 물리적 결과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의 성취에 집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죽는다는 더 이상 슬픈 일이 아니다.

주인공의 성취에 한 발자국 더 다가간 것이니 해피한 것이다.

주인공이, 그것도 공유가 죽었는데도 이 영화를 보고 해피엔딩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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