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인현 Jan 28. 2021

새벽에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그들이 사는 세상

2019년 10월 28일 새벽 2시 53분

누군가가 다급하게 문을 두드렸다.


어제는 나의 엘에이 데뷔날이었다.

피아니스트인 나는 여러 가지 이유로 엘에이에 이사 온 후 연주를 하지 못했다. 무대가 그리웠지만 무대에 설 수 없던 나에게 손을 내밀어 준 동료들 덕분에 나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엘에이에서의 첫 연주라는 타이틀은 그 어떤 연주보다도 더 큰 긴장과 떨림을 요구했다.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부터 연주가 끝나는 순간까지, 한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끊임없는 심호흡은 나의 긴장을 들키지 않게 도와주었고, 머릿속으로는 쉼 없이 연주할 음악을 되뇌었다.

어떻게 무대에 올라 인사하고 연주했는지 희미한 기억과 완벽주의자 성향의 나에겐 아쉬움이 남는 무대였지만 함께한 연주자들과 관객들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사실 관객들이 괜찮다면 괜찮은 무대이지 않은가..

새로운 곳에서 연주자로서 다시 활동할 수 있음에 감사한 순간이었다.


연주가 끝나고 긴장이 풀린 나는 하루 종일 나를 케어하느라 고생한 남편과 조촐한 술자리를 가졌다. 집에 있는 와인에 적당한 안주거리를 벗 삼아 팽팽한 긴장감 속의 하루를 마무리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둘 다 고된 하루였는지 누가 먼저라고 말할 것도 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업어가도 모를 만큼...


갑자기 쿵쿵 쿵쿵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깊게 잠든 우리는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연속되는 큰 소리에 내가 먼저 눈을 떴다. 무의식 중에 나는 남편을 흔들어 깨웠다.


"일어나 봐. 무슨 소리가 들렸어. 누가 문을 두드린 거 같아. 한번 나가봐바."

"무슨 소리..!?!"

"일단 가봐봐. 분명 문 두드리는 소리였어."


남편은 옷을 주섬주섬 걸쳐 입고 대문으로 나갔다.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니겠지..."

태어나서 처음 겪는 일에 내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고 머릿속은 별별 상상으로 가득 찼다.

안방으로 돌아온 남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커튼을 제쳤다.


오 마이 갓!


내 눈앞에 펼치진 광경은 믿을 수가 없는 모습이었다. TV에서 볼 법한 상황이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빨갛게 물든 하늘이었다. 너무 기막힌 상황에 그저 넋을 놓고 쳐다보고 있었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다.


"정신 차려. 베란다 나가서 호수에 물 틀어서 빨리 바닥에 물 뿌려. 건조하면 안 되니까 어서 빨리. 저쪽 불이 이쪽으로 올지도 모르잖아. 나는 마당에 있는 잔디 물 틀어놓고 올게. 겁먹지 말고 그냥 물만 뿌려."




그렇게 남편은 마당으로 향했고 나는 잠옷바람에 베란다에서 열심히 물을 뿌렸다.

만약에 사태에 대비해서인지 동네에 흐르는 전기는 전부 끊어졌고 불빛이라곤 후레쉬 뿐이었다. 살겠다는 의지 하나만으로 수도꼭지에 연결된 호수에 모든 것을 걸고 뿌려댔다.

암흑 속에 오직 보이는 건 빨간색으로 물든 하늘 그리고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뿐이었다.

들리는 소리는 소방차 사이렌과 소방 헬기의 돌아가는 소리 그리고 물소리뿐이었다.


무섭고 두렵다는 생각 외에는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또 배는 왜 아픈 것인가.

연주 끝났다고 집에 와서 너무 먹었던 탓인가...

정말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오 노.. 긴급상황이라고..

배는 미친 듯이 아파오고, 전기는 안 들어오고,

눈앞에 불은 활활 타오르고, 진짜 진퇴양난이었다. 어쩌란 말인가..

자연재해도 무서웠지만 나의 뱃속은 이미 나의 컨트롤을 벗어나는 중이었다.

'모르겠다. 일단 화장실부터 가자. 불에 타 죽기 전에 기절하겠어.'

암흑 속에 벽을 손으로 더듬으며 무사히 화장실에 안착했다.

나는 그때 알았다. 겁쟁이에게 어둠 속의 화장실은 또 다른 공포를 준다는 사실을...

일이 벌어지는 동안 '여기는 우리 집이다. 나는 괜찮다. 이 또한 지나간다. 곧 끝난다.'를 열심히 중얼거리며 무서움을 이겨내고자 했다.


몸이 가벼워진 나는 다시 자리로 돌아와 수도꼭지를 최대로 틀어 정신없이 물 뿌리기에 돌입했다. 살아보겠다는 일념으로 그렇게도 열심히 했다. 오 마이 갓만 한 100번 넘게 외쳤을 거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꿈같았다.

현실이라고 하기엔 너무했다.

어제는 나의 아름다운 연주회 날이었다고....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시간이 좀 지나자 다시 전기는 들어왔고 위급한 상황은 아니라는 생각에 안도감이 들었다.


"어서 짐 싸. 아직 주에서 오더 한 건 아닌데 혹시 모르니까 싸놓자. 바로 나가야지. 앞 집은 벌써 나가는 거 같더라. 윗집은 차가 도로에 나와서 시동 걸려있어."


물 뿌리고 나서 좀 괜찮나 했더니 짐을 싸라니..

이삿짐도 아니고.. 여행 가는 짐도 아니고..

무엇을 어떻게 싸야 하는 것인가..


"일단 네가 생각하는 제일 비싼 거랑 소중한 거랑 꼭 필요한 거만 챙겨. 만약을 대비하는 거니까 너무 걱정 마. 우리 집은 아무런 문제없을 거야. 바로 윗 산도 아니고 건너편 산이잖아. Just in case."


남편의 설명에도 무엇을 챙겨야 할지 막막했다. 나는 무념무상으로 이것저것 짐을 챙겨 차에 실었다. 차에 올라타서도 이게 무슨 일인지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판단이 되지 않았다. 몇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이 상황은 당황스러웠고 믿을 수가 없었다. 그저 꿈을 꾸는 듯했다.


남편은 윗집 찰리와 이야기를 하고 오더니


"몇 년 전에 우리 쪽 산에 불이 났었는데 대피한 사람 집만 탔대. 그래서 찰리는 일단 짐은 싸고 차만 대기시켜놨대. 좀 더 상황을 지켜보고 움직일 거라고 하더라. 우리도 짐은 다 실어놨고 차도 빼놨으니까 집에서 뉴스 보면서 좀 상황을 지켜보자."



뉴스에서는 거의 재난 수준의 상황을 라이브로 방송하고 있었고, 우리는 숨죽여 텔레비전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트위터와 인스타그램에서는 산불로 인해 집을 떠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줄을 이었고, 남 이야기라고만 생각할 수 없는 나에게 그들의 뉴스는 더욱 안타깝게 느껴졌다.

LA를 포함해서 근처의 소방차와 헬기는 총출동했고 그들은 쉴 새 없이 계속 물을 뿌려댔다. 만약을 대비해 구급차도 대기 중이었다. 어둠 속에서의 4시간은 나를 40년 늙게 만들었다. (그래도 시간은 흐르더라.)

힘든 어둠을 잘 버텨낸 결과 하늘은 점점 밝아지고 있었다. 하늘이 밝아졌다고 불길이 잡히는 건 아니지만 무서움은 좀 줄어들었다.



불길을 잡아보겠다는 일념으로 헬기와 비행기는 24시간 내내 하늘을 맴돌았고 그들의 노고에 커피라도 가져다 드리고 싶었지만, 하루 종일 집에 있는 나에게 그 소리는 또 다른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우리 집 밑에 있는 주유소는 소방차 대기소로 변해있었고, 불로 인해 도로들은 전부 닫혔다. 그렇게 물을 뿌려대는데도 불길은 전혀 잡힐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며칠이나 걸릴까.. 잡히기는 할까..

저 산만 잠깐 타고 정말 우리 쪽은 괜찮을 걸까..

매일 기도했다. 바람 불지 않게 해 달라고..


그렇게 3일이 지났나 보다.

많은 사람들의 기도와 소방관들의 노력이 하늘을 감동 하사 바람이 잦아들었고 상황은 매우 좋아졌다. 불길이 잡히자 산 중턱에 소방관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저녁에는 땅 밑에서 불씨들이 꿈틀거리고 있었지만, 그리 큰 문제가 되는 아이들은 아니었다.


모든 상황이 정리되었는지 더이상 헬기와 비행기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남은 재와 복구를 위해 소방관들이나 관련된 사람들만 보일 뿐 더이상 불이슈는 아니었다. 우리는 연주가 끝난 그날 밤처럼 마음 고생을 위로하며 조촐하게 축배를 들었다.

"혹시 오늘 축배 들었는데.. 새벽에 불났다고 다시 문 두드리지는 않겠지!?!"


안 그래도 걱정을 사서 하는 내가 이 일을 겪고 난 후 바람이 많이 불고 건조할 때면 산불 걱정에 전전긍긍한다. 나는 단 한 번도 주택에 살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당연히 아파트에 살고 아파트에서 평생 뼈를 묻을 줄 알았다.


내가 엘에이에 시집와서 산불을 걱정하며 살지 누가 알았겠는가...

옛말에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인생이라더니..


산불 사건 이후 웬만한 일이 아니고선 잘 놀래지 않는다. 비록 힘든 시간이었지만 아무래도 산불이 나에게 대담함과 넓은 시야를 선물한게 아닌가 싶다.  



*그런데 말입니다.

산불을 그렇게 걱정했던 우리에게 지진이 일어났었습니다. 저는 야생동물이 우리 집을 공격하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이제 산불과 함께 지진까지 걱정하게 되었네요.

 


                                                                새벽에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하루 종일 열 일하는 헬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