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사는 세상
어느 날, 남편이 나를 불렀다. 그리고 조심스레 봉투를 건넸다.
"자, 이거 받아."
봉투를 보자마자 심장은 쿵쾅거렸고 눈은 엄청 반짝거렸다.
"이게 뭐야? 오늘 무슨 날이야? "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차 속 서랍에 넣어둬. 네가 사고를 당하기 전까진 절대 열어서는 안 돼."
한국에서 대학교 다니던 시절부터 미국 유학 시절 때까지 나는 꽤 오랫동안 운전을 했다. 그래서인지 운전만큼은 자신 있었다. 심지어 피아노의 페달로 단련된 나의 발은 자동차의 엑셀과 브레이크를 섬세하게 다룰 줄 알았다. 그런 나에게 사고 언급에 이어 봉투라니.. 보너스인 줄만 알았던 나는 실망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고 궁금한 건 절대 못 참는 성격이라 보채며 다시 물었다.
"지금 열어보면 안 돼? 꼭 사고가 나야 열어볼 수 있는 거야? 나 너무 궁금하단 말이야."
그는 아주 단호하게 "지금 안돼!! 절대 열어보면 안 돼!! 꼭 사고 나면 열어봐!!"
몰래 열어 볼까 생각도 했지만 사고 치면 얼굴에 티 나는 스타일이라 눈을 질끈 감고 자동차 서랍에 봉투를 얼른 집어넣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또 하나의 흰 봉투를 건넸다. 이번에는 진짜 보너스 봉투인가?! 설레는 마음을 안고 나는 물었다.
"이게 뭐야? 설마 보너스? 대박! 무슨 일이야!!"
그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쏘리, 아니야. 혹시 자동차에 누가 탈 일이 생기면 봉투 안에 있는 서류에 사인하고 태워."
그의 말에 갑자기 내 머릿속은 하얘졌다.
'이건 무슨 소리인 거지. 친구가 내 차를 타는데 왜 서류에 사인을 해야 하는 거지?'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물었다.
" 무슨 서류인데?"
그는 차분히 설명했다.
"만약, 사고가 났을 시 운전자는 책임이 없다는 내용의 문서야. 그 문서에 서명하면 동의한다는 거고..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 사고가 나서 동승자에게 문제가 생기면 일이 복잡해질 수 있어. 잘 생각해봐. 우리가 패러글라이딩이나 스카이 다이빙할 때 하기 전에 혹시 잘못되어도 주최 측은 책임지지 않는다는 서류에 사인하잖아. 그거랑 같은 거야."
그의 이야기에 나는 동의할 수 없었다.
'스카이 다이빙이랑 누군가가 내 차 타는 거랑 같은 위험 수준이라고?!? 이건 문화의 차이인가 아니면 개인의 차이인가...' (참고로 그는 교포이다.)
서로 너무 다른 생각을 가진 터라 대화로 풀어가기엔 좀 무리가 있어 보였다. 일단 두 번째 흰 봉투를 차 서랍에 넣어두고 나는 생각했다.
'친구를 차에 태우지 말아야겠다.'
"내일 아이 친구들이 놀러 오나 봐. 밑집 마당에 또 약 엄청 뿌리더라. 그것도 엄청 꼼꼼하게 장난 아니야. 원래 애들 놀러 오기 전에 저렇게 약 다 뿌려?"
태어나서 처음 보는 광경에 나는 신기한 듯 물었다.
" 혹시 벌레 때문에 아이들이 다치거나 문제 생기면 집주인이 책임져야 해. 그래서 미연에 방지하는 거야. 내가 너한테 누군가 차 타면 사인받으라고 했던 거 있잖아. 그거랑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돼. "
잊고 있었던 흰 봉투였는데.. 그의 언급으로 나는 다시 물었다.
"미국은 원래 그래? 사람이 차에 타면 그렇게 다 사인받아? 나 유학할 때는 안 그랬는데.. 친구한테 어떻게 사인하라고 말을 해. 나는 자신없다. "
그는 나를 위해서라는 말과 함께 자신의 이야기를 해나갔다.
"너네는 학교에서 여행 가고 소풍 갈 때 보호자 사인 안 받았어? 내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는 외부로 견학을 가거나 소풍을 갈 때 몇몇 어머님들이 자원봉사로 함께 가주셨어. 애들은 30명인데 선생님이 한 명이면 교실도 아니고 감당할 수가 없잖아. 어머님들은 우리들을 돌봐주시는 역할도 하셨지만 라이드도 해주셨어. 그 어머님들 차에 타기 전에 꼭 우리는 부모님 사인을 받아왔어야 하는데 그게 바로 혹시 사고가 났을 시 운전자는 책임이 없다는 내용의 안내문이었어. 지금까지 그런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나였지만 그 날을 이상하게 빈 종이로 간 거야. 이번이 처음이기도 하고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건지 나는 잘 몰랐어. 그런데 싸인 안 해왔다고 출발을 안 한대. 내가 하겠다고 했지만 절대 안 된대. 그래서 회사에 일하시던 아빠가 오셔서 서명해주시고 겨우 출발했어. 완전 민폐 중에 민폐였지. 지금 생각하면 내가 왜 그랬나 싶어. 아찔했다 그때. 그래서 그때 이후로 자동차 서랍에 그 서류 넣어두고 가족 외의 사람이 타면 서명하라고 하는 거 같아."
그의 이야기에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제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이해가 되었다고 해서 내 차를 탄 친구에게 사인하라고 말할 자신은 없다.
내가 아직 경험이 없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서명의 중요성을 잘 몰라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아직은 친구에게 싸인을 요청하는 행동이 차갑고 정 없는 모습 같아 어색하다.
미국에 계속 살면서 이런저런 경험 속에 나도 어느 순간 친구에게 서류를 건넬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아직 아닌 듯하다.
*그리고 그 첫 번째 서류는 사고 나면 바로 열어볼 생각이다. 아직까지 서랍에 잘 보관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