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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현 Mar 25. 2021

그는 나에게흰 봉투를건넸다.

그들이 사는 세상

어느 날, 남편이 나를 불렀다. 그리고 조심스레 봉투를 건넸다.

 "자, 이거 받아."

봉투를 보자마자 심장은 쿵쾅거렸고 눈은 엄청 반짝거렸다. 

"이게 뭐야? 오늘 무슨 날이야? "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차 속 서랍에 넣어둬. 네가 사고를 당하기 전까진 절대 열어서는 안 돼."


한국에서 대학교 다니던 시절부터 미국 유학 시절 때까지 나는 꽤 오랫동안 운전을 했다. 그래서인지 운전만큼은 자신 있었다. 심지어 피아노의 페달로 단련된 나의 발은 자동차의 엑셀과 브레이크를 섬세하게 다룰 줄 알았다. 그런 나에게 사고 언급에 이어 봉투라니.. 보너스인 줄만 알았던 나는 실망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고 궁금한 건 절대 못 참는 성격이라 보채며 다시 물었다.

"지금 열어보면 안 돼? 꼭 사고가 나야 열어볼 수 있는 거야? 나 너무 궁금하단 말이야."

그는 아주 단호하게  "지금 안돼!! 절대 열어보면 안 돼!! 꼭 사고 나면 열어봐!!"

몰래 열어 볼까 생각도 했지만 사고 치면 얼굴에 티 나는 스타일이라 눈을 질끈 감고 자동차 서랍에 봉투를 얼른 집어넣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또 하나의 흰 봉투를 건넸다. 이번에는 진짜 보너스 봉투인가?! 설레는 마음을 안고 나는 물었다.

"이게 뭐야? 설마 보너스? 대박! 무슨 일이야!!"

그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쏘리, 아니야. 혹시 자동차에 누가 탈 일이 생기면 봉투 안에 있는 서류에 사인하고 태워."

그의 말에 갑자기 내 머릿속은 하얘졌다.

'이건 무슨 소리인 거지. 친구가 내 차를 타는데 왜 서류에 사인을 해야 하는 거지?'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물었다. 

" 무슨 서류인데?"

그는 차분히 설명했다. 

"만약, 사고가 났을 시 운전자는 책임이 없다는 내용의 문서야. 그 문서에 서명하면 동의한다는 거고..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 사고가 나서 동승자에게 문제가 생기면 일이 복잡해질 수 있어. 잘 생각해봐. 우리가 패러글라이딩이나 스카이 다이빙할 때 하기 전에  혹시 잘못되어도 주최 측은 책임지지 않는다는 서류에 사인하잖아. 그거랑 같은 거야."

그의 이야기에 나는 동의할 수 없었다.

'스카이 다이빙이랑 누군가가 내 차 타는 거랑 같은 위험 수준이라고?!?  이건 문화의 차이인가 아니면 개인의 차이인가...' (참고로 그는 교포이다.)

서로 너무 다른 생각을 가진 터라 대화로 풀어가기엔 좀 무리가 있어 보였다. 일단 두 번째 흰 봉투를 차 서랍에 넣어두고 나는 생각했다. 

'친구를 차에 태우지 말아야겠다.'


"내일 아이 친구들이 놀러 오나 봐. 밑집 마당에 또 약 엄청 뿌리더라. 그것도 엄청 꼼꼼하게 장난 아니야. 원래 애들 놀러 오기 전에 저렇게 약 다 뿌려?"

태어나서 처음 보는 광경에 나는 신기한 듯 물었다.

" 혹시 벌레 때문에 아이들이 다치거나 문제 생기면 집주인이 책임져야 해. 그래서 미연에 방지하는 거야. 내가 너한테 누군가 차 타면 사인받으라고 했던 거 있잖아. 그거랑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돼. "


잊고 있었던 흰 봉투였는데.. 그의 언급으로 나는 다시 물었다.

"미국은 원래 그래? 사람이 차에 타면 그렇게 다 사인받아? 나 유학할 때는 안 그랬는데.. 친구한테 어떻게 사인하라고 말을 해. 나는 자신없다. "

그는 나를 위해서라는 말과 함께 자신의 이야기를 해나갔다.

"너네는 학교에서 여행 가고 소풍 갈 때 보호자 사인 안 받았어? 내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는 외부로 견학을 가거나 소풍을 갈 때 몇몇 어머님들이 자원봉사로 함께 가주셨어. 애들은 30명인데 선생님이 한 명이면 교실도 아니고 감당할 수가 없잖아. 어머님들은 우리들을 돌봐주시는 역할도 하셨지만 라이드도 해주셨어. 그 어머님들 차에 타기 전에 꼭 우리는 부모님 사인을 받아왔어야 하는데 그게 바로 혹시 사고가 났을 시 운전자는 책임이 없다는 내용의 안내문이었어. 지금까지 그런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나였지만 그 날을 이상하게 빈 종이로 간 거야. 이번이 처음이기도 하고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건지 나는 잘 몰랐어. 그런데 싸인 안 해왔다고 출발을 안 한대. 내가 하겠다고 했지만 절대 안 된대. 그래서 회사에 일하시던 아빠가 오셔서 서명해주시고 겨우 출발했어. 완전 민폐 중에 민폐였지. 지금 생각하면 내가 왜 그랬나 싶어. 아찔했다 그때. 그래서 그때 이후로 자동차 서랍에 그 서류 넣어두고 가족 외의 사람이 타면 서명하라고 하는 거 같아."

그의 이야기에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제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이해가 되었다고 해서 내 차를 탄 친구에게 사인하라고 말할 자신은 없다.

내가 아직 경험이 없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서명의 중요성을 잘 몰라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아직은 친구에게 싸인을 요청하는 행동이 차갑고 정 없는 모습 같아 어색하다.

미국에 계속 살면서 이런저런 경험 속에 나도 어느 순간 친구에게 서류를 건넬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아직 아닌 듯하다.


*그리고 그 첫 번째 서류는 사고 나면 바로 열어볼 생각이다. 아직까지 서랍에 잘 보관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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