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사는 세상
나는 단지 우유가 필요했을 뿐이다.
집에 가는 길이 그렇게 멀고도 어려울지 전혀 몰랐다.
대통령의 영향력은 역시 어마어마했다.
나는 붐비지 않는 오전에 마트 가는 걸 좋아한다. 사람도 별로 없고 길도 막히지 않아 기분 좋은 쇼핑을 할 수 있는 이유였다. 그런데 그 날은 나답지 않았다. 갑자기 우유를 필요하다며 오후 3시쯤 집을 나섰다. 그 시간이면 학교 끝나는 시간이라 한국처럼 아이들을 픽업하기 위해 기다리는 엄마들로 도로가 마비되는 걸 뻔히 알았음에도 나는 차에 올라탔다. (보통 나는 필요한 게 생기면 기다렸다가 다음날 오전에 나가는 편이다.) '막혀봐야 20-30분이니까 음악 들으면서 갔다 오자.'라는 생각에.. (보통은 10분이면 가능한 거리이다)
우유와 필요한 야채 그리고 과일을 사고선 더 막히기 전에 집에 도착하고픈 마음에 서둘러 마트를 나왔다. 차에 타자마자 소변의 신호가 왔지만 20분 정도는 거뜬 참을 수 있는 정도라 다시 마트로 들어가기보다 빨리 집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그런데....
마트 주차장에서 나오자마자 생각보다 심한 교통정체에 나는 당황했고, 불길한 예감은 엄습해왔다.
'아.. 공사하나?! 무슨 일이지..? 애들 픽업하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 건가..?'
별의별 생각을 다하며 경찰의 지시에 따라 우회길로 운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집으로 가는 길은 대부분 통제되어있었고, 통제되지 않는 길은 거의 없었다. 공사나 아이들 픽업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을 정도로 도로 전체를 봉쇄한 느낌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테러범인가? 아니면 마약범인가? 아니면 살인범인가?'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내 마음은 초조해졌다. 겁 많은 쫄보라 경찰한테 물어볼 용기 조차 없던 나는 회사에서 열심히 근무 중인 남편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무슨 날이야? 마트 갔다가 집에 가는 길인데 다 막았어.. 나 지금 화장실 엄청 가고 싶은데..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폭탄 설치 이런 거는 아니겠지..?"
남편이 얼마 뒤에 답을 보내왔다.
"오늘 저녁 6시에 트럼프 대통령이 베버리힐즈 자기 집에서 대통령 선거자금 기금 행사한대. 엘에이 공항에 내려서 산타모니카로 비행기로 이동하고 거기서 자동차로 자기네 집으로 간대. 그래서 산타모니카에서 베버리힐즈로 가는 근처의 길을 다 막은 거 같아...'
아... 정치인 등장!! 아니 대통령 등장!!
역시.. 그랬다. 공사나 단순한 행사가 아니었다. 통제되지 않는 길을 따라가 보니 나는 우리 집과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대학교 안에 들어와 있었다. '마트 주차장에서 신호 왔을 때 화장실 갈걸..'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내 배는 점점 빵빵해져 갔고 참고는 있었지만 화장실을 가고픈 마음은 강해져 갔다. 학교 안에 차를 세워놓고 화장실을 가자니 차는 주차장에 세워야 가능한 일이었고, 학교를 잘 모르는 내가 헤매지 않고 화장실을 찾을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마침 또 그날은 아이들이 방학을 끝내고 기숙사로 들어오는 날이었다. 그래서 짐을 실은 차들로 학교 안이 어수선했다.)
'학교 뒷문으로 나가서 도로만 건너면 우리 집 가는 골목길이 나오니까 도로만 건너자. 거기는 통제할 일이 절대 없어. 조금만 참자. 좀만 참으면 돼!!'
한줄기의 희망을 안고 뒷문으로 향하는 차량 행렬에 동참했다. 나처럼 다른 길이 막혀서 온 차들과 아이들 내려주고 돌아가려는 부모님 차들로 인해 막히긴 했지만 그래도 곧 나의 차례가 돌아올 거라는 기대감에 나는 들떠있었다.
오 마이 갓!!
이건 또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그 길만 건너면 이제 모든 게 원만하게 괜찮아지는 순간이었는데, 내 앞 차부터 경찰이 도로를 통제하는 게 아닌가....
'저 길만 건너면 되는데... 2차선인데... 아놔.. 트럼프님 진짜 저한테 왜 이러시나요. 맨날 오전에 가면서 하필 오늘은 왜 이 시간에 마트를 간 거니.. 하루라도 조용한 날은 없는 내 인생인가..'
머릿속이 하얘지고 멍해지면서 정말 딱 미칠 지경이었다. 정말 경찰과 한판 뜨고 싶었지만 총을 들고 있는 그에게 나는 단 한마디의 항의도 할 수 없었다. 속에서는 불이 나고 있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내 얼굴은 미소로 가득했다.
빵빵해질 때로 빵빵해진 배를 움켜잡고 정신을 가다듬은 나는 집으로 가는 마지막이자 유일한 방법인 고속도로를 타기로 마음먹었다.
생각이나 해봤겠는가...
집 앞의 마트에서 집에 간다고 고속도로를 탄다는 게...
간신히 고속도로로 들어온 나는 무시무시한 교통정체 속에서도 곧 화장실을 갈 수 있는 생각에 기뻤다. 하지만 집으로 가는 출구를 봉쇄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마음을 완전히 놓을 수는 없었다.
주님이 나의 간절함을 알아주신 건지 정말 너무 감사하게도 집에 가는 출구는 활짝 열려있었다. 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세상 빠르게 화장실로 뛰어들어갔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차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나의 상태는 안 좋았다.)
10분이면 가능한 그 길을 2시간 30분에 걸쳐서 오다니...
'트럼프는 아직 선거하려면 한참이나 남았는데 벌써부터 행사를 해야 하는가. 꼭 워싱턴에서 엘에이까지 날아와야 했는가. 꼭 자기 집에서 행사를 치러야만 했는가.. 나랏일 챙기기도 바쁠 텐데..'
티브이 속에 나오는 정치인들을 보며 나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특히 대통령은 내가 태어나 죽을 때까지 나와 거리가 먼 사람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트럼프 때문에 큰 일을 치를 뻔 한 순간을 경험한 뒤로 정치인은 더 이상 나와 동떨어진 사람이 아닌 나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다시는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라본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무슨 일이 있어도 마트는 오전에 가며, 가기 전에 엘에이에 큰 행사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TMI
트럼프가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더 이상 도로 통제는 없을 줄 알았더니, 옆동네 브랜우드에 사는 헤리스가 부통령이 되었다. 몇 주전 부통령 헤리스가 자기 집으로 주말을 보내러 온 날, 나는 주말 내내 집을 지켰다. 물론 또 그런 일이 생기지 않겠지만, 도로에 갇혀 끙끙대던 나 자신이 생각나 나갈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