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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리 May 22. 2021

참 다른 감성

나의 할머니들

나의 양가 조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셨다. 하지만 살아계셨을 때도 이렇다할 추억은 없다. 우리집은 지금 돌이켜보면-당시에는 어땠는지 모르겠으나- 이상할 만큼 엄마의 친정 출입을 통제했고 그래서 내게 외할머니는 1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분이셨다. 그래도 외할머니는  나와 오빠가 오는  빳빳하 하얀 봉투를 준비해서 오천원의 용돈을 넣어주셨다. 내가 자라서 삼촌들께  많은 용돈을 받을 때도 나는 외할머니의 오천원이  하얀 봉투가  좋았다. 외할머니는 이쁜 아이들이라고, 엄마   들으라고, 교회 가라고 했지만 이름 모를 어른들에게 듣는 것처럼 싫은 느낌은 아니었다. 아마 외할머니가 강요하는 분이 아니어서 그랬을 거다. 친할머니는 , 원픽인 장손에게 올인하는 분이셨고. 나는 항렬도 선호도도 밀리는 편이어서 우리 남매는 그분에게 차다 못해 약간 쉰밥이었다. 나보다 어린(그리고 할머니가  좋아하는) 사촌들이 메뚜기를 잡을  아홉 살인 나한테는 콩을 까라 했던 분이니 굳이  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믿는다.

 얼마 전에야 깨달았다. 나는 할머니의 손맛 같은  모르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물론 할머니 댁에 내려가면 떡집에서 쪄온 술떡이나 제사 음식 같은  먹어봤다만 그건 사온 음식이고, 제사 음식은 할머니가 하는 법이 없었다. 결국 돌고 돌아 큰엄마 아니면 우리 엄마 손맛이었다. 외할머니는 이미 연세가 너무 많으셔서 차마 할머니가  하신다던 가자미 식해 해달라고 조를 상황이 아니었다. 게다가 외가에는  얻어먹을 만큼 오래 머물렀던 적이 없다. 끽해야 반나절이었으니. 가장 먼저 떠나는 집은  우리집이었고. 그게 못내 불만이었다. 그나마 이쁨받는 친척집이 외가인데  놀만 하면 아빠가 흥을 깼다. 삼촌이 장을 보시고 숙모가 음식을 해주셨지만 할머니 손맛은 모른다. 아예  모르는 분야이다보니 지금껏 부럽다는 생각도   적이 없다. 영혼 없이 좋겠다, 정도만 생각했다. 그래서 다니엘을 만날 때마다 그가 그렇게 칭찬하는 할머니의 손맛이 뭔지,  미지의 분야에 대해 아는 맛을 총동원해서 상상했었다. 처음 다니엘의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에게 볼을 맞대어 인사했을 , 티내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했지만 깜짝 놀랐었다.나이든 사람들의 피부를 만져보는  너무 오랜만이었다. 조금 건조하고 약간 오돌토돌한 피부였다.

 마지막으로   파리에서 함께 식사를 했던 날이니 다니엘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를 뵙지 못한  벌써 1년이 넘었다. 정부 규제가 완화될 때마다 찾아뵙겠다고 말씀을 드리고 약속을 잡았지만 약속 며칠 전에 이동 금지 규제가 강화되거나 일이 생겨 가지 못했다. 겨우 이동 금지 거리제한이 풀려 찾아뵐  있었던  저번 주말의 일이다. 처음으로  분의 집에서 묵게 되었다. 오랜만에 할머니가 해주신 브리오쉬도 먹고, 할머니가  요리해주실지 손꼽아 기대하는 다니엘이 귀엽고  신기했다. 그리고 나와 다니엘은 2 3일동안 거하게 사육당했다.

첫날 저녁(일곱 시쯤 도착했다)
아귀 테린느
오이와 크림, 부추를 넣은 샐러드
세가지 치즈(두가지의 브리, 염소 치즈 하나)
한입 까눌레

둘째날 아침
브리오쉬와 집에서 만든 
오렌지 주스


둘째날 점심
월계수잎을 곁들인 송아지 백숙
비스마티 쌀밥
샬롯 식초로 버무린 샐러드
민트를 곁들인 딸기 화채
네가지 치즈 (위에 흐블루숑 추가)

둘째날 저녁
게살, 훈제 연어, 망고를 넣은 샐러드
네가지 치즈 (위에 흐블루숑 추가)

셋째날 점심
흐블루숑과 구운 사과를 곁들인 파이
소갈비 스테이크 
다섯가지 치즈 (위에 강하게 숙성된 블루치즈가 추가)
패션, 복숭아, 망고를 올린 머랭 케이크 

 나는 사오신 음식이 하나도 없다는 데에 충격을 받았다(주스 제외). 기억이 나지 않는 부분은  써서 아마 빠진  한두가지는 있을  같지만 나는 프랑스 가정의 어마어마한 손맛에 압도되었다. 무엇보다  분의 삶은 내가 아는 노년 바이브와는 너무 다른 것이었다.  친할머니는  나이가 되셔서도 강박적으로 집을 청소하고 밭일을 하시는  매일이 바빴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즐겨서 하시는 기색도 아니었다. 몸은 너무 바쁜데 얼굴은 지루해 보였다. 웃는 일이 별로 없는 분이었다. 외할머니 역시 종교에  뜻을 두시긴 했지만  외에 달리 취미생활이라고  만한 일은 별로 없었다. 한국의 할머니들을 상상했을  '너무 오래 살아서 이런 꼴을 보는구만', ' 죽었어  양반,    보게', '내가 죽어야지~~내가 죽어야 ' 같은 몹쓸 말씀을 하시는 모습은 너무  상상이 되는데, 머리를 빠글빠글하게  할머니들이 수면 아래의 질투와 약간의 적의,  아예 없지는 않은  줌의 애정을 부딪히는 마을 회관 바이브도 참으로 친숙한데 말이다. 다니엘 할아버지 댁에서는 무슨 영화를 보는 기분이었다. 할머니...당신이 프랑스의 타샤 튜더인 것입니까...

 우선 다니엘 외할머니께서는 취미가  많다. 여든을 넘긴 연세가 무색하도록 기억력은 비상하신 편이고, 할아버지와는 카드 게임의 일종인 브릿지를 같이 즐기신다. 브릿지 클럽에도 참가하신다. 거기에 가드닝, 요리는 아주 오래된 취미이고  정원을 혼자 돌보시다 보니  바쁘시다. 하지만 대화를 나눠보면 진정 즐겨서 하는 일이라는  쉽게   있다. 평소에는 조용하신 분이 말도 빨라지시고 눈도 반짝이는  눈에 띄기 때문이다. 특히 빗물을 담은  수십개를 쌓아 올려 만든 비상 물병 창고를 보여 주실 때의 표정이란. 천진한 장난꾸러기 같은 표정이었다. 독서도 상당히 즐기셔서 이번에 갔을  나와 다니엘에게 막심 고리키의 책을 권하셨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분을 찾아뵙기 전에 정세랑 작가님의 '시선으로부터'라는 책을 읽었는데  책에도 소위 '교양 있는'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예술, 추억, 취미 이야기를 하는 부분이 많이 나왔기 때문에 나는 잠시, 명절에 모이면 돈얘기, 땅얘기, 자식얘기, 군대 얘기, 가십 얘기만 하는  나의 친척들 뿐이었나-그마저도 상당히 오래된 일이고- 하는 생각에 살짝 아찔했다.  이런 저런 가족이 있는 거겠지.

 물론 다니엘이 한국 사람인데 동일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어떤 분들한테는  감상이 부유한 집안과 그렇지 않은 집안의 격차에서 오는 괴리감으로 비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시대적 배경을 조금이라도 의식한다면 금방 나의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가 한국 전쟁을 넘어서 아직 일제의 지배 하에 있던 시기에 태어나셨다는    있다. 굳이 할머니 세대까지 가지 않아도 지금 30대인 나의 고모, 어머니, 사촌이 남자 형제에게 밀려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공장이나 전업 주부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아주 흔하게 찾아볼  있다. 그런 만큼 나는 다니엘의 할머니와 할아버지  분이 고등학교에서 만나셨다는 사실도, 할머니께서 대학 공부까지 마친  수학 선생님으로 오래-한국에서는 누군가의 할머니가 학사까지 학업을 마쳤다는 사실만 해도  사는  자제분이셨구나? 라는 반응이 나오기 마련이다- 근무하셨다는 사실도 신선하게 느껴졌다. 그때 우리 할머니는  하고계셨을까? 다니엘의 외할아버지, 할머니께서 결혼하셨을 때쯤 (1961) 유리 가가린이 최초로 우주 비행을 했고, 박정희가 군사정변을 일으켜 군정이 실시되었다. 나는 치매에 걸려서도 강박적으로 바닥을 닦고, 음식하는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 패닉에 빠지는 우리네 할머니들의 비극이 전쟁의 그림자에 깊게 닿아 있다고 보고 있기 때문에, '내가 죽어야지', '너무 오래 살아서' 내지는 ' 늙어서 그런(좋은, 비싼, 예쁜) 뭐하러' 같은 말을 너무 당연히 하시는 우리네 할머니와 다니엘 할머니 댁에서 보낸 날들의 눈부심 사이가 많이 아팠다.

 꼴랑 이틀 지내며 가져본 얕은 관찰이고, 프랑스 전국의 할머니들의 여가사용과 언어사용 실태 조사를  것도 아니지만 자식들이 몰려 평소보다 활기가 있었을 명절에마저도 짙은 권태를 풍기던  할머니의 일상과는 정말 다른 날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는 적잖은 충격이었고,  개인적으로는 나도 이제 할머니 손맛이 뭔지 안다는 생각에 가슴이 뿌듯한 주말이었다. 이제 '할머니 손맛' 책에만 나오는 단어도 아니고, 나는 할머니 손맛을 표방하는 프렌차이즈 음식집의 잔상이 아닌 지극히 개인적인 맛의 기억을 선물받았다. 그런 만큼 이번 방문은 특별하게 기억될 것이다.


두 분 앞에서는 아직 부끄럼을 타서 사진이 이것뿐이다
흐블루숑 파이
갈비살 통구이
절묘하게 잘 익었다
머랭 케이크
나는 머랭을 즐겨 먹는 편이 아닌데 정말 맛있게 잘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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