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체리 Aug 28. 2021

개며드는 파리

깊어가는 교우관계

 가끔씩 생기는 불상사로 마음을 퍽퍽하게 만드는 파리 생활이지만 귀여움은 세상을 구한다는 말처럼 나도  번씩 잇몸을 훤히 내놓고 우연히 마주친 귀여움에 젖어들 때가 있다. 그런 순간들이 파리를  낭만적으로 만들어 주지는 못하지만 내일을 기대하게는 만들어 주니 생활에서 없어선   순간이라 하겠다.


 2차 백신을 맞으러 가는 길이었다. 나는 그날까지만 해도 코로나의 공포 때문에 쇼핑을 나간 적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백신 센터로 가는 길목의 다양한 옷 가게를 눈으로 훑으며 걸었는데 누군가가 자기 개를 자라(Zara) 점포 도난 방지 게이트에 묶어놓고 옷을 사러 간 게 아닌가. 많은 개들이 그런 상황에 놓이면 불안한 눈치로 가게 안만 바라보는데 이 녀석은 덩치는 작아도 냉면사발 같은 마음을 가졌는지 아주 침착하게 앉아 허공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옆에 서있는 보안요원 아저씨가 큰 몸을 옆으로 기울여 앞을 보는 것도, 온전히 개를 보는 것도 아닌 자세를 한 후 손끝으로 개를 만지는 게 아닌가. 첫 근무일이어서 혹시 한소리 들을까 봐 신경을 썼던 것일까? 다니엘 친구 마티유가 손님 없는 시각에 그저 벽에 기대서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꾸짖는 전화를 받은 걸 보면 아주 있을 수 없는 추측은 아닐 것 같다. 그렇지.. 근무 중에 멍멍이는 못 참지.. 나는 산처럼 건장한 사내와 그의 주먹만 한 개 사이의 우정이 한없이 귀엽게 느껴지다가도 그런 애매모호한 자세로 개를 만질 수밖에 없었던 사정에 생각이 미치면서 마음이 쌉쌀해졌다. 그냥 전날에 운동을 너무 많이 해서 근육통 때문에 그런 자세를 취한 것뿐이라면 좋으련만.


 나는 굳이 고르면 개보다는 고양이를 좋아하는 편이다. 그렇지만 이 파리는 무의식의 저편에서부터 내가 '개며들'(개 + 스며들다) 수 있도록 판을 까는 도시가 아닐까 생각하게 될 때가 있다. 일단 매 순간 접할 수밖에 없는 개똥의 존재부터가 그런 음모설을 믿게 만든다. 그날 나는 동네의 한국 치킨집에서 닭강정을 픽업한 후 집에 가져가는 중이었다. 내가 집을 나설 때 이미 흥에 겨워 치킨 접시와 콜라를 세팅하던 다니엘의 얼굴을 생각하니 더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주말 오전 지하철이라 한산하긴 해도 냄새 때문에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었는데 지하철 문 앞에 정말 귀여운 오드아이 개가 내 쪽을 보고 활짝 웃는 게 아닌가. 포메라니안이 조금, 그리고 허스키가 한 꼬집 거기에 또 스피츠 종의 개가 한 큰 술 섞인 듯한 덩치와 외모였다. 하지만 개는 무릇 튼튼하고 행복한 게 제일 아니겠는가. 개는 흔들림 없이 내 쪽을 봤고, 나는 '.. 역시 K-치킨이다'라고 생각하며 혹시 주변 승객들이 불쾌해하지는 않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개의 주인은 파리 사람 같지 않게 붙임성 좋은 시선을 내게 던졌다. 어느 순간 나는 개가 보고 있던 게 나의 치킨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탔던 지하철은 8호선인데, 이 호선은 각 차량 양 끝에 ㄷ자 모양으로 좌석이 배치되어 있다. 그 ㄷ자 좌석 안에 7개월 정도 된 듯한 검은 래브라도 개가 있었는데 탈 때는 미처 몰랐던 것이다. 둘은 서로에게 100% 집중하고 있었다. 각자의 주인들이 3초에 한 번씩 앉으라고 말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서로의 엉덩이 냄새를 맡을 기세였다. 개들은 비록 3초에 한 번씩 집중력을 잃었지만 주인이 앉으라고 하면 순순히 앉기는 했다. 다시 눈이 마주치자 개 주인이 '내 새끼지만 참 답이 없어요' 하는 투의 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는 그다음 역에서 내렸기 때문에 그 후로 어떤 일이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언제나 컴컴하고 방귀 냄새가 나는 8호선 객차 안에서 꽃 피운 귀여운 우정 덕분에 그날 몇 번이나 웃었다. 부디 그 둘이 서로의 엉덩이 냄새를 맡을 수 있었길 바란다.


 위에서 개똥 이야기가 나와서 생각이 났는데 우리 아파트는 개를 산책시키기에 좋은 공간이 확보되어 있고, 또 차량이 다니지 않는 탓에 개를 키우기에 좋은 조건이다. 그래서 아파트 내에서 개 산책시키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는데 개똥을 안 치우는 주인도 많기 때문에 발밑을 조심하며 걷는 지혜가 필요하다. 별로 좋은 일은 아니지만 살다 보니 싫어도 적응이 되었는데 다들 심하다 느끼기는 했던 모양인지 지난주에 관리사무소 이름으로 편지가 왔다. 개똥 좀 치우고 살라고. 하지만 그 편지가 온 후에도 사람들은 여전하다.


 1차 백신 접종 이후 다니엘과 아이스크림을 먹은 후 시내 구경도 하고 집에 들어가는 길이었다. 지하철을 기다리는데 반대편 승강장에 치와와로 추정되는 작은 강아지가 주인 커플과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개는 저렇게 작은 입마개도 나오나 싶을 만큼 작은, 병뚜껑 정도 사이즈의 입마개를 하고 있었는데 치와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마저도 한방에 웃음을 터트릴 만큼 귀여웠다. 나와 다니엘은 목소리를 쫙 깔고 '내가 왜 입마개를 하고 있냐고?' '그럴 만한 일이 있었거든' 따위의 대사를 중얼거리며 숨죽여 낄낄거렸다. 프랑스에서도 입마개는커녕 목줄도 안 하고 다니는 대형견들이 꽤 있어서 녀석의 존재는 단연 눈에 띄었다. 이 작은놈이 어떤 곡절로 입마개를 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덕분에 100배는 치명적이고 늠름해 보이는 효과가 있었다.


 파리의 견주들은 집채만 한 개를 데리고도 자연스럽게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한다. 주인이 식사를 하는 동안 개들은 테이블 밑에 엎드려 지루하다는 듯이 하품을 하지만 전채에 본 요리, 디저트가 다 비워질 때까지 용케 잘 앉아있는다. 사람한테도 쉽지 않은 일인데 말이다. 언젠가 '개들은 자기 친구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을 잘 알아본다'는 투의 얘기를 들었다. 그 얘기를 믿기로 작정한 나는 개들이 지나가면 꼭 눈을 맞추려 노력하는데 지베르니에 갔던 날 나의 정성이 하늘에 닿았는지 옆자리 사람들이 데려온 개가 자리를 이탈하여 내 무릎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맞춰왔다. 실수로 별가루가 들어갔는지 유난히 반짝이는 눈에 긴 속눈썹을 가진 개였다. 아쉽게도 우리의 만남은 개 주인의 황급한 사과에 의해 중단되었지만 우리의 우정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우리 아파트로 이사온지 1년이 다 되어 간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 아파트는 개를 키우기에 나쁘지 않은 환경이다. 그 때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개들도 꽤 많이 사는 편인데 아무래도 개 산책은 매일 비슷한 시간에 시키다 보니 대강 어느 동에 누가(어떤 개가) 사는지 정도는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프랑스에 와서 친구들도 몇 명 생기긴 했지만 동네 친구가 없는 나는 동네 인싸들에 대한 약간의 동경을 품고 있었다. 손님들 이름을 쫙 꿰고 있는 집 앞 제과점 아저씨, 그리고 음식을 주문하다 보면 친구들이 차를 타고 가다가 경적을 울리며 버스 기사 아저씨 스타일의 인사를 하고 지나가는 집 근처 케밥집 아저씨를 보며 외향형 인간들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동시에 그런 일이 내게 일어나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나는 놀랍게도 같은 아파트 개로부터 비슷한 경험을 선물 받게 된다. 몇 층인지는 모르지만 우리 건물에 사는 대형견이 역 앞 건널목에서 공을 물고 걸어가다가 내게 다가와 코로 내 손을 툭 치고 지나간 것이다. 마치 매일 보는 친구처럼. 물론 우리가 딱히 친분이 있었던 건 아니어서 그다음 날부터는 다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갔다.


 개보다는 고양이를 좋아한다고 쓴 사람 치고는 꽤나 상세한 개포트(개 + 리포트)가 되었지만 이것은 파리라는 도시가 알게 모르게 나에게 튼튼하고 행복한 개들의 미소를 주입해온 결과가 아닐까? 이곳에서 얼마나 살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에 사는 동안 얼마나 많은 개들과 추억을 쌓게 될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 유급 휴가가 5주인 나라답게 펫 시터를 찾는 웹사이트에 들어가면 개나 고양이 돌봐줄 사람을 찾는 공고가 많다. 시급은 15유로 정도이고 개들의 경우는 산책도 업무에 포함이 된다. 개나 고양이를 키운 경험이 있고 산책 중인 개를 제어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추천할 만한 아르바이트다! 펫 시터 일자리는 인터넷으로도 찾을 수 있지만 세탁방 게시판에 전단지를 붙여놔도 좋을 것이다. 특히 코로나 시국에 공부하느라고 집안에 앉아만 있는 학생 입장이라면 한 번씩 긴 산책도 할 겸 좋은 아르바이트가 아닐까 싶다. 물론 생명을 돌본다는 책임감이 중요하겠지만.

이전 10화 나는 일름보가 될 것이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