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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리 Jul 31. 2021

우기기 대장의 시련

어? 내기해??


아직 나와 다니엘이 서로를 알아가던 시절, 나는 다니엘이 뭔가를 우길 때 어떤 근거가 있어서 그런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다니엘이 우긴다고 해서 꼭 그것을 믿어야 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니엘이 꼭 잘 아는 것에 대해서만 우기지는 않는다는 걸 가끔 보았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요즘 대 솔드(Soldes), 즉 전국 세일 기간을 맞이했기 때문에 우리는 오랜만에 집을 나섰다. 다니엘의 썬글라스와 셔츠를 사야 했다. 이럴 때가 아니면 다니엘이 적극적으로 쇼핑하는 일은 별로 없기도 했고 말이다. 여러 개의 썬글라스를 신중하게 비교한 결과 다니엘에게 정말 잘 어울리는 모델을 하나 골랐는데, 다니엘이 너무 좋아하는 걸 보니 고작 몇 주 차이 가지고 솔드 때까지만 기다리자고 타일렀던 게 너무 미안했다. 다니엘은 나보다 눈 색이 옅은 탓에 내가 '좀 밝은가?' 정도로 생각하고 넘어갈 햇살도 꽤 괴로워하는 편이라서 그렇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썬글라스는 꽤 오래된 탓에 자외선 차단 효과가 살짝 의심스러웠고 말이다.  


 다행히도 예쁘게 맞는 셔츠를 살 수 있었다. 우리가 방문한 백화점은 라파예트였고 이곳은 내가 2017년 '나는 그렇게 파리로 왔다'를 쓸 때 다니던 회사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걸리는 곳이다. 백화점은 그렇게 자주 가지 않았지만 백화점에서 가까운 자리에 내가 정말 좋아했던 에그타르트집이 있어서 다니엘을 데리고 그리로 갔다. 이곳은 포르투갈 음식도 같이 파는데 내가 종종 왔을 때처럼 치킨 요리와 말린 대구 그라탕을 팔고 있었다. 내가 한창 그곳에 다녔을 때는 다니엘과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웠던 시기인데 어느새 결혼을 해서 여기를 왔다는 마음에 조금 감동한 채 디저트까지 해치우고 일어났다. 이곳에 들를 때면 늘 에그 타르트를 12개씩 사서 한동안 잘 먹곤 했는데 이번에는 다이어트를 향한 다니엘의 열정으로 8개만 사들고 역까지 걸어갔다. 한참 걷다 보니 못 보던 파떼 극장 간판이 보여 '어? 여기 파떼 없었는데' 라고 말했다. 그곳에서 좀 떨어진 곳에 고몽이라는 극장은 있었는데 파떼극장 특유의 눈에 띄는 노란 간판은 본 적 없었다. 그러자 다니엘이 씩 웃으면서 '네가 어떻게 알아?'라는 것이다. 자기 부인이 1년을 직장 생활한 골목에서 말이다.


 나는 조금 어이가 없었지만 애가 뭘 모르기 때문이므로 관대히 넘어가려 했다. 찬찬히 설명을 해도 우기기 대장 다니엘의 이죽거림은 사그라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내가 여기서 직장 생활 좀 했다고 이 동네의 모든 걸 다 아냐는 것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에그타르트를 사러 그 골목을 걷던 나의 노력에서 가장 큰 이득(손 하나 까딱 않고 아침 커피에 곁들일 에그타르트를 획득)을 본 게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집에 가기 위해 지하철 8호선을 타려면 꼭 그 골목을 걷는다고 설명해도 다니엘은 기분 나쁘게 히쭉 웃으면서 내기를 제안하기 시작했다. 나는 굳이 내가 1년이나 다닌 골목에서 진심으로 내기를 한다는 게 비인간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에 이기나 지나 타격이 없는 내기를 걸었다. 진 사람이 이긴 사람 보고 싶은 영화를 본다거나, 진 사람이 하루 종일 우리 고양이를 만질 기회를 잃는다거나. 하지만 다니엘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내가 자신이 없기 때문에 내기 같지도 않은 내기를 건다고 나를 도발하기 시작했다. 나는 점점 북방한계선을 침범당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다니엘은 그 동네에 한 번밖에 오지 않았으면서 시종 자기가 이길 거라 생각했고 내게 생각을 잘 하라고, 자기는 내가 못 보는 러시아 공포영화를 선택할 거라고 했다. 이때 다니엘을 굳이 봐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돈 거는 건 아닌 것 같아 돈은 좀 아니잖냐고 말했더니 다니엘이 20유로 정도면 뭐 어떻냐고 한 번 더 흔들기에 나는 머리에 피가 몰려 100유로를 걸라고 말했다. 사실 내가 너무 유리한 게임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응하지 않을 거라 생각해서 제안한 건데 다니엘이 덥석 물기에 얘가 어디서 들은 소리가 있어서 이러나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니까 '파떼 극장이 생긴 게 내가 회사를 그만둔 뒤라면 내가 이기고, 파떼 극장이 내가 회사에 다닐 때도 있었다면 다니엘이 이기는' 게임이었다. 나는 프랑스어 검색에 자신이 별로 없어서 걱정을 조금 했지만 파떼 오페라라고 검색하자마자 결과가 나왔다. 나의 승리였다. 나는 허약해서(기력이 딸려서) 그런지 내가 이긴다고 해서 그렇게까지 이죽거리지는 않는데 이날 다니엘이 너무 짜증 났기 때문에 온 힘을 다해 날뛰기 시작했다. 다니엘이 100유로로 뭘 하고 싶냐고, 화장품을 살 거냐 하기에 '아니? 옷을 사서 그걸 입고 네 앞에서 패배를 각인시켜 줄 거야'라고 말했고, 내기 돈으로 받은 옷이 도착하면 그걸 입고 같이 문제의 파떼 극장으로 가자고 했으나 다니엘은 거절했다. 이 기쁜 소식을 에띠엔과 마티유와도 나누자고 했더니 다니엘은 살짝 어두워진 얼굴로 '걔들은 몰라도 돼..' 라고 했다. 결국 만화를 그리는 것에 대해서는 허락을 받았지만 별로 기쁜 기색은 아니었다. 밤낮 가리지 않고 '내가 이겼을 때 기억나니?'라고 말했으며, 다니엘이 중요한 유로 챔피언스 리그 게임을 보다가 인터넷이 먹통이 되었을 땐(당시 이미 프랑스가 탈락한 후였다) 일인극을 하는 배우처럼 프로젝터 앞에 서서 '처음엔 프랑스가 탈락했죠... 그다음엔 마누라한테 져서 백 유로를 잃었어요... 세상에나 마상에나 그다음엔 축구 채널이 안 나오는 거예요... 내 이름은 다니엘이에요..'라고 하며 놀려댔다. 돌이켜 봐도 정말 알차게 즐긴 승리였다.


 내기 건이 있고 처음으로 맞은 주말에 우리는 장을 보러 나갔다. 나는 학창 시절 공부를 잘했던 다니엘에게 궁금한 게 있어서 "네가 만약 지금의 지능을 갖고 과거로 돌아간다면 공정함을 위해 슬렁슬렁 시험 볼 거야? 아니면 모든 시험에 열정을 다 할 거야?"라고 물으니 다니엘은 "영재 취급받아봤자 매 시험에 받아야 할 점수가 높아질 뿐이니 평소엔 대충 하다가 대입 같은 것만 열심히 할 거야."라고 답했다. 다니엘은 "월드컵 성적은 다 머릿속에 있으니까 그걸로 돈이나 벌어야지. 공부 아무 소용 없어 내기에 이기는 게 중요해."라고 덧붙였다. 나는 참지 못하고 "마치 우리의 내기처럼?"이라고 덧붙였고, 다니엘은 저번 내기로 본인이 잃은 것이 생각보다 훨씬 크다면서-자신의 권위- 절규했다.


 그래서 나는 새 옷을 입고 다니엘 앞을 얼쩡거릴 수 있었냐고? 아쉽게도 그 목표는 실현되지 못했다. 나는 프랑스 중고 거래 앱에서 그 원피스를 샀는데, 판매자가 옷에 구멍이 있다기에 댁이 할인만 해주면 상관 않고 구매하겠다고 말했더니 갑자기 옷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판매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못 정했다는 식으로 나와 2주 동안 메시지에 답도 안 하고 시간을 끌어댔다. 결국 환불도 받고 다 잘 해결은 되었는데 승리의 흥분이 좀 가라앉고 나자 굳이 또 다른 원피스를 사는 것도 아니다 싶고 나의 승리는 충분히 즐겼기에 원피스는 받은 셈 치기로 했다.


 그 후로 어? 내기해?라는 말이 잠시 유행했는데, 내가 한국에서 가져온 썬글라스를 찾지 못해 온 집을 뒤지고 다닌 일이 있다. 나는 설명을 돕기 위해 내가 그 썬글라스를 작년 겨울 라 클루자에 가져갔었다고 말했는데, 다니엘이 또 자꾸 아니라고 우기는 것이다. 한국에서 가져온 썬글라스를 개시할 첫 기회였으니까 내가 잘못 기억할 리가 없는데 말이다. 게다가 다니엘이 몇백 장이나 되는 사진을 찍어 줬으니 물증도 충분한 편인데. 다니엘이 어? 내기해?라고 물었을 때 나는 그래!! 사진 보여줘?라고 말했다. 아직 백 유로의 상처도 가시기도 전의 일인데 그렇게 선뜻 내기를 걸어올 줄 몰랐기 때문에 나는 한 번 더 놀랐다. 사진이 있다는 얘기를 듣자 다니엘은 황급히 도발을 취소했지만. 사실 누구보다도 내기를 사랑하는 다니엘의 진면모를 확인하는 기회였다.




 안녕하세요 체리입니다. 제가 인스타그램에만 살짝 이야기를 하고 정작 브런치에서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네요. 아직 한국에서 식도 안했고(코로나 때문에 기약도 없고 / 그렇게 살다 보니  해야하나 하는 생각이 조금 들기 시작했고) 제가 유명한 사람도 아니라  쑥스러워서 따로 포스팅을 해야 하나 고민이  들었지만 인생의 중대사인데 지금까지 봐주신 분들과 제대로 나누는  예의인지라 짤막하게 보태게 되었습니다. 다니엘과 저는 이제 부부가 되었구요. 한국 혼인 신고도 마쳤습니다. 생활은 원래 같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변한 것이 그다지 없고 그저 이제 서류 상으로도 가족이구나 하는 감상만 있네요.  시국인지라  친구는 한명도 오지 못해서  쓸쓸하긴 했지만  한국에서 식을 한다면 다니엘도 온통  친구밖에 없는 곳에서 결혼할 수도 있는지라 어쩔  없는 일이죠. 시청 결혼식이 생각보다 일찍 끝났구요(30 조금 안되게) 다같이 식사만 하고 헤어졌습니다. 애정을 갖고 지켜봐주시는 분들과 함께 소식 나눌  있어서 많이 기뻐요. 앞으로  싸우진 않겠지만..(그게 지금 시점의 의지로 결정되는 일이 아니니까) 그래도 아끼면서 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몇 안되는 결혼사진은 인스타 @cerise.toon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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