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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리 Sep 25. 2021

국가가 허락한 유일한 노출

하반신의 인권을 찾아서

* 노래하는 컷에서 나온 러시아 노래 'Na pole tanki grohotali' 는 네이버와 인스타그램에서 국제결혼개그만화를 연재하시는 휴르르(@Hylulu_comics)님께서 '아는 노래가 없어서' 에피소드에서 소개해주신 것을 보고 산부인과에서 열심히 버틴 저의 심정에 잘 어울리는 곡이라 양해를 구한 후 만화에 사용했습니다. 휴르르님 감사합니다! 뜻밖의 성덕이 된 체리.. 제법 장해요 ..!!

프랑스 정부 덕분에 지난번 이야기에 이어 이번 이야기도 병원 가는 이야기다. 이곳에서 병원을 다닌 지도 이제 3년 정도 되어간다. 감사하게도 프랑스에 온 뒤로는 이렇다 할 큰일이 없었기 때문에 MRI 같은 비싼 검사를 받을 일은 없었다. 게다가 프랑스에서는 회사를 옮기더라도 우리나라처럼 대대적인 건강검진은 잘 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살짝 위기감을 상실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 이런 말을 하면 듣는 현업자들은 기분이 나쁘겠지만 나는 애초에 프랑스 행정에 아무 기대가 없었기 때문에 정부가 이렇게까지 세심하게 나의 여성 건강을 챙겨줄 거라는 생각 자체를 못 하고 있었다. 자궁경부암 검사를 받으러 가라는 한 통의 편지가 도착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편지는 아래와 같은 문장으로 시작했다.

"우리는 1차로 지난 8월에 편지를 보냈지만 네가 검사를 받은 것 같지 않아 다시 이 편지를 보낸다. 이 서류를 들고 가까운 산부인과를 방문하도록 해."

 그 와중에 8월에 보냈다던 편지는 코빼기도 볼 수 없었다는 점이 프랑스 행정답다고 해야 할까. 유럽권 산부인과를 방문한 한국 걸(Girl)들이 지른 비명을 똑똑히 들은 나는 이제 내 차례가 왔다는 생각에 뒷목이 빳빳이 굳는 것을 느꼈다. 산부인과 검사는 굴욕의 개구리 의자 때문에 한국에서도 악명이 높지만 유럽권에서는 우리나라 산부인과에서 검사를 하기 전에 제공하는(검사용 가운 같은 용도의) 헐렁한 통치마 한 벌조차 주지 않아 태곳적의 자신으로 강제 회귀하여 하반신을 드러내고 검사를 받을 수밖에 없다던 소식을 나는 지난 3년 동안 심심찮게 들어왔던 것이다.

 그것도 산부인과마다 다를 거라고 애써 희망을 길어올리던 나는 OFII, 이민국 신체검사 당시 엑스레이를 찍기 위해 가축병원의 소라도 된 양 상반신을 드러내고-가운을 주지 않아서- 검사실을 배회했던 과거를 떠올렸다. 이런 상황에 희망을 가지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일찍이 일말의 존엄에 대한 기대를 모두 놓았다. 다니엘은 안쓰럽다는 듯 보면서도 두세 달 안으로 꼭 검사를 받으라는 뜻을 분명히 했다. 다니엘이 병원에 가야 할 때마다 나 역시 강경하게 밀어붙였기 때문에 할 말이 없었다.

 처음에는 꼭 여성 전문의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회사 주변과 집 주변의 산부인과 전문의를 샅샅이 찾아본 결과 나는 그냥 나대지 말고 시간이 되는 선생님한테 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풍문으로 요즘 코로나 때문에 (프랑스는 봉쇄 기간이 있었기 때문에) 태어나는 아기들이 많아 조산부며 전문의 인력이 귀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여파가 내게도 미칠 줄이야.. 일단 여성 전문의 선생님들의 수부터가 적었을 뿐 아니라 쇄도하는 예약 때문인지 거의 90퍼센트 가까이 되는 여성 전문의들이 온라인 예약을 받지 않았다. 초진 환자는 아예 안 받는다고 인터넷에 명시한 의사들도 있었고, 겨우겨우 온라인으로도 예약을 받는 여성 전문의를 찾으면 가장 빠른 예약이 두 달 뒤였다. 물론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전화를 돌려도 되었을 것이고, 다니엘 역시 예약 잡는 걸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일단 언제 예약이 가능한지 모르는 상태에서 전화를 돌리는 이상 다니엘이 간신히 예약을 잡아도 그날 내가 시간을 내지 못하면 괜히 김빠지는 결과만 불러올 뿐 아니겠는가. 게다가 시간이 오래 걸리거나 복잡한 검사도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자꾸만 작아지는 마음을 달래가며 집에서 8분 거리에 있는, 게다가 7시에도 진료를 보는 남자 전문의를 방문하기로 했다. 상대적으로 간단하기는 했지만 남자 전문의 예약이라고 쉬운 것도 아니었다.

 의사 사무실을 방문할 때는 카드를 받지 않는 곳도 많기 때문에 현금을 준비하는 게 좋지만, 자주 보는 주치의 선생님은 늘 카드를 받기 때문에 이번에도 현금 뽑는 걸 잊어버렸다. 임신 여부, 병력, 가족력, 낙태 여부, 피임 방식 등에 대한 문진을 마치자 악몽의 개구리 의자 시간이 찾아왔다.

"Déshabillez vous(옷을 벗으세요)"

초로의 의사가 말하는 동안 나는 한국에서 앉아본 개구리 의자들이 사실 꽤 편한 축에 속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앞의 의자에는 대체 허벅지를 올리라는 건지 발꿈치를 올리라는 건지 모를 스테인리스 컵홀더 모양 쇠붙이가 두 개 달려있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럴 생각으로 입고 간 건 아니었지만 나는 랩 원피스를 입었기 때문에 상상했던 것처럼 하반신을 훤히 드러내고 진료받지 않아도 되었다. 그날 아무 생각 없이 랩 원피스를 택했듯이 그 옆에 있던 청바지를 집었다면 검사 후 집에 오는 길이 훨씬 더 참담했을 것이다. 진료실 칸막이에 아무것도 걸려있지 않았던 걸 보니 가릴 것 자체가 아예 주어지지 않는 게 분명했다. 처음 받아보는 검사는 매우 불쾌했고 정신에 해로웠다. 검사 이후 이미 생기를 잃어버린 나는 이 검사를 2년에 한 번씩 받아야 한다는 의사의 말에 아득한 피로감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돈을 낸 후 피로를 달고 집에 왔을까? 그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검사는 여기서 끝이었지만 절차는 아직 더 남아 있었다. 웬걸,, 의사는 검체를 담은 통을 내게 주더니 이 통을 내가 직접 분석 센터로 보내야 한다고 했다. 검체와 함께 보내야 할 서류도 받았다. 검사 결과가 나오면 그 결과가 나의 집과 의사의 사무실로 모두 도착하는데 결과가 나쁠 시에는 의사가 다시 한번 내게 서면으로 알려준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미 이곳의 우편 지옥에 상당히 익숙해졌다고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뭐라 말하기 힘든 분노가 정수리에서 넘쳐흐르는 것을 느꼈다. 나는 정말이지 이 나라에서 아프고 싶지 않다.

 살짝 투명도가 높아진 채 밖으로 나오자 비가 내리붓고 있었다. 8분만 걸으면 되는 가까운 거리였지만 나는 극심한 피로감에 그냥 지하철을 탔다-다니엘은 그 얘기를 듣고 깔깔 웃었다-. 퇴근한 다니엘은 내가 들고 온 서류를 보더니 머리를 감싸 쥐고 '편지랑 의사가 준 서류랑 왜 이렇게 다른 게 많아?'라고 물었다. 정부에서 온 편지에는 편지에 붙은 스티커를 떼서 검체 통에 붙이라고 되어 있었지만 의사 양반이 흐린 눈으로 편지를 읽은-내가 보는 앞에서 슥 보긴 봤다만- 건지 스티커는 편지에 그대로 붙어있었고 검체 용기는 이미 밀봉된 후였다. 또 편지에는 '의사가 이미 우표가 붙어있는-그래서 내가 우편 요금을 낼 필요가 없는- 봉투를 줄 거라고 쓰여 있었지만 그날 받은 봉투에 우표 따위는 없었고.. 또 검사 센터에 낼 17유로의 수표를 편지에 동봉해야 했다. 다니엘이 나 대신 문서를 작성하며 왜 이 검사에 드는 모든 수고가 환자한테 지워지는 거냐고 투덜거렸다. 그러게.. 말이다.. 다니엘 아.. 우체국이 이 봉투를 분실하기라도 하면 나는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겠지만 그 또한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일 것이다.



+ 검체를 보내고 9일이 지났더니 편지가 하나 왔다. 당연히 검사 결과일 거라 생각했지만 그 생각은 빗나갔다. 이 검사는 국가에서 보조하기 때문에 내가 돈을 낼 필요가 없었으므로 동봉한 수표를 돌려주는 편지였다. 그건 그것대로 좋은 소식이지만 9일이 지나도 결과를 받아볼 수 없었다는 점이 또 프랑스답다.


(혹시 궁금하실까 봐 찾아본) 병원에 있던 의자와 비슷한 사진


https://www.distrimed.com/product_info.php?products_id=5177&gclid=CjwKCAjw7fuJBhBdEiwA2lLMYUVPfRmir3upB1clOU5A2faRkgJedNbLhQKu8fL8GEpKU6kRKQsF4RoCBdMQAvD_Bw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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