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쓰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언어를 가진 사람이 된다는 말과도 같다. 그러면 그 누구도 그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김민섭, 831019 여비 – 내가 너의 첫문장이었을 때 中)
오늘의 이야기
평소보다 조금 일찍 눈을 뜨고 조금 더 오래 몸을 움직였다. 오늘은 출장이 예정되어 있었다. 익숙한 공간에서 한 주를 시작하지 못한다는 두려움 때문에 오늘의 예열에 시간을 더 사용했다.
40분 정도 현장 주변 스타벅스에서 마음의 준비운동을 하고 단단한 심지를 굳혔다. 중심이 잡힌 감독처럼 보이고 싶어 마음을 더 굳힌다.
나는 토목 공사 현장을 관리하는 감독으로 일하고 있다. 올해 10년 차에 접어들었는데 아직도 이 일은 나에게 익숙하지 않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 일이 아닌 다른 일로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럴 때마다 더 무리해서 읽고 많은 일기를 쓴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야 하고 종종 서로의 이해관계를 경계해야 하며 일주일에도 몇 번은 큰 소리를 내며 언쟁을 해야 한다. 일을 시작한 지 꽤 되었지만, 상대에게 빈틈을 보이면 안된다는 생각에 아직도 현장에 가는 일이 익숙하지 않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현장에 나가기 전 잔뜩 긴장을 한다.
현장은 걱정하는 것보다 훨씬 유연하게 잘 돌아가고 있었다. 내가 머릿속에 떠올려봤던 많은 변수들 또한 발생하지 않았다. '언제나 미리 걱정할 필요가 없구나' 생각하며 안심했다. 현장 담당 직원들과 공사 진행 현황을 체크했고 안전 관련 이슈를 논의했다. 아직 찬바람이 많이 불던 현장에서 안전모를 눌러쓰고 1시간 30분 정도를 보냈다.
금새 몸이 차가워져 가까운 카페에 들어갔다. 안전모를 들고 커피를 받아들었다. 코로나 체크인을 깜빡해 핸드폰을 다시 들고 비치된 기계를 향해 걸어갔다.
"체크인 안 하셔도 돼요." 카페 직원이 말했다. "네?" 내가 되물으니 그분은 "아. 드시고 가시는 거예요?" 했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고 하려던 체크인을 마쳤다.
자리에 앉아 커피잔에 손을 녹였다. 녹은 손으로 책을 집어 들어 읽었다. 얼마 후 한 손님이 들어와 주문을 했다. "학생증이나 직원증 있으세요?" 나는 귀가 번쩍 뜨였다.
나도 여기 직원인데 왜 나에게는 물어보지 않았을까.
테이블에 놓여있는 안전모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가 나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말들이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내가 가진 나만의 언어가 있고 그 언어로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나는 오랜 시간을 지금의 일에서 벗어날 궁리를 했다. 4년 동안 다녔던 첫 직장에서 도망치면서, 다시는 이 일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결국 돌고 돌아 다시 안전모를 쓰고 현장에 가고 아직도 자주 싸우며 지낸다.
요즘 매일 뭔가를 읽고 느끼고 그것을 적어가며 나의 오랜 믿음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그 균열은 나에게 큰 가능성을 선물했다. 쓸만한 이야기가 따로 있는게 아니라는 것. 고로 나의 일상이 소중한 소재가 될 수 있다는 것. 내가 감동받았던 순간, 상처 받았던 일들, 미안했던 감정 그리고 잊고 싶지 않았던 경험들이 이 세상에 둘도 없이 소중한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것.
오늘 내가 안전모를 들고 흙 묻는 발로 카페에 들어와 앉아 있는 것처럼. 현장에서 온 몸에 흙을 묻히고 일하는 분들이 카페에 들어온다면 어떤 대우를 받을까 하는 사유로 번져가는 것. 내가 내 일을 벗어나지 않고도 내 사유를 옮겨적는 것만으로도 또 다른 누군가의 세계에 작지만 굵은 균열을 만들어가는 것. 내가 이 일을 했어야 하는 그 이유를 1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깨닫게 되는 것.
나는 매일 지하철을 갈아타고 버스로 바꿔타며 출근을 한다. 출근길에 일상속의 나를 보호하기 위하여 내 몸을 겨우 가누면서도 책을 읽는다. 그리고 생각한다. 책 속의 소중한 이야기들이 내 일상의 의미를 함께 찾아준다. 나의 이야기들이 머릿속을 훨훨 가볍게 날다가 없어져버리기 전 소중하게 모아 양손에 쥐어본다.
사무실에 들어가기 전 매일 아침 일기를 쓴다. 종이에 적어보기도 하고 때로는 SNS에 다시 옮겨본다. 이렇게 쓴 이야기들을 출근길 에세이로 묶어보았다.
건조한 일상을 모아 물 한 방울 떨어뜨려 조금씩 뭉쳐보니 생각보다 많은 끄덕임이 모인다. 용기를 모아 또 다른 이야기도 예쁘게 뭉쳐본다. 나를 위한 또 당신을 위한 이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