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흐릿하게 만들 용기
전공이 토목공학인 나는 여자보다 남자 동료의 비율이 높은 직장에 다니고 있다. 남초 직장에 다니는 적지 않은 여성들이 그렇듯 나 또한 내 성별을 크게 부각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 왔다. 첫 직장에 이어 두 번째 직장에서까지 10년이 넘는 시간을 남자들의 동료로 인정받기 위해 여성동료보다는 남성에 가깝다고 인정받는 명예남성이라도 되고 싶었다.
부러 고된 일들을 거절하지 않고 때로 더 만들어가면서까지 했고, 만들어지는 술자리와 오는 술은 거절하지 않았으며, 각종 프로젝트를 진행함에 있어서 빈틈없이 보이려고 노력했다. 이런 노력만이 남자 동료들과 가까워지는 길이라고 믿었다. 그렇게 홀로 분투하던 중 남자 동료, 남자 선배들만으로 이루어진 사조직의 존재를 알았을 때나 그들만의 옥상 담배타임 대화에 내가 자주 제외되고 또 자주 뒷담화의 재료로 올라갔다는 것을 확인할 때마다 나의 노력이 모두 물거품이 되는 것을 반복적으로 목격하고 겪었다. 그렇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렇지 않은 척 더 노력하는 것뿐이었다.
결혼을 하고 기혼 여성이 된 후에도 나의 직장 생활에 크게 타격받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혹여 임신을 하게 되고 출산을 한 후 복직을 하고 나서도 나의 근성으로 잠깐의 공백은 모두 메꿀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난임여성이 되기 전까지는.
난임병원에서 받은 난임 검사를 통해 나의 난소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난임검사를 하게 되면 나팔관 양쪽 중 막힌 곳이 없는지와 피검사를 통해 AMH(항뮬러리안호르몬) 수치를 통해 난소 건강의 지표로 삼는데, 나의 경우 이 수치가 내 나이대에 비해 나쁘게 나왔다.) 이미 유산도 한차례 경험했고 나는 30대 후반, 남편은 40대 초반이라 마음이 급했는데 결과를 눈으로 확인하니 더 이상 자연임신이 되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검사 결과를 들었던 당일, 난임 진단서를 발급받았다.
당장 한 명분의 월급이 줄어들게 되니 남편과의 상의가 필요한 문제였지만, 나에게 가장 큰 산은 회사에 이 사실을 알리는 것이었다. 12년간 남초 직장에서 내가 부었던 노력이 순간 물거품이 돼버릴 것 같았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남들에게는 한순간도 내가 여성 동료가 아니었던 적은 없었겠지만. 난임 여성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일은 알몸으로 타인들 앞에 서는 것과 비슷한 일이었다. 그렇게 없애고 싶었던 남자 동료, 선배들 사이에 있었던 경계를 지우고 싶었던 내손으로 그 경계에 담을 쌓아 올리는 것 같았다. 다시는 그들의 동료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나에게는 아직도 여성이라는 자격지심이 온몸을 단단하게 감싸고 있었다. 나도 잊고 있었던 감각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남편과의 상의 후 난임휴직을 내기로 결정하고 회사 측에 나의 의사를 전달해야 하는 날이었다. 해야 하는 말을 머릿속에 정리하고 몇 번이고 연습했다. 그들이 내보일 불편한 표정, 내가 감당해야 할 뒷말들을 미리 시뮬레이션했다. ‘술자리, 옥상 뒷담화는 당분간 내 이야기로 가득하겠구나.’ 하는 생각들은 미리 나 스스로에게 상처를 만들었다. 그리고 같은 사무실의 만삭 임신부들과 탕비실에서 해맑게 이야기하고 있는 나를 보면 그들은 또 무슨 이야기를 만들어낼까 하고 괜한 망상을 하기도 했다. 어깨가 한없이 오므라들고 축 처졌다.
‘마음이 나를 더 잡아먹기 전에 용기를 내야 한다!’ 생각하고 직속 후배에게 먼저 이 결정을 알렸다. 내가 휴직을 하게 되면 당장 2인분의 일을 해야 할 후배에게 가장 미안했던 터라 함께 현장에 나가는 길에 커피 한 잔을 사며 이야기를 꺼냈다. ‘OO 씨에게 정말 미안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아.’ 말을 어렵게 꺼내는 나에게 후배는 ‘혹시 회사를 잠깐 비우셔야 하는 거면 다른 사람 말고 선배를 먼저 생각하세요.’ 라며 오히려 나를 위로했다. 나의 유산을 한 번 옆에서 지켜보고 업무 근태를 처리해 줬던 후배라 난임 휴직을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후배는 ‘자신의 가족 중 한 사람도 난임으로 오랜 시간 고생했어요. 그게 여성의 몸에 큰 무리를 주는 일이라 엄청 고생하더라고요. 어렵고 힘든 결정 하시느라 고생하셨어요. 조금이라도 빨리 이런 결정하신 게 잘하시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말했다. 얼어붙어있던 마음이 이내 스르륵 녹으며 눈물이 또르르 떨어졌다. 후배는 당황하며 냅킨을 가져와 건넸다.
후배의 말이 나에게는 갑옷같이 든든한 무기가 되었다. 나의 진심과 나의 상황을 알아주지 않는 이들의 말과 행동을 신경 쓰는 일은 나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각성을 하게 되었다. 머뭇거리지 않고 앞으로 해야 할 일과 나에게 집중하자! 그렇게 각성한 덕분에 팀장, 부서장에게 휴직 결정을 망설임 없이 알릴 수 있었다. 함께 일하는 다른 동료들에게도 눈치 보지 않고 휴직 예정 사실을 알리며 업무 인수인계를 시작했다. 나를 잘 모르는 100인이 하는 뒷말이 가져오는 두려움보다 나를 잘 아는 1인의 응원에 크게 감응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다.
그랬더니 신기한 일이 생겼다. 그동안 회사에서 강하고 밝은 척만 해오던 내가 휴직을 신청했다는 소식을 들은 많은 동료, 선후배들이 하나 둘 마음을 보태준 것이다. ‘그동안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어. 회사 쪽으로 머리도 두지 말고 회사 생각하지도 말고 마음 편하게 가져요,’ 말하는 이들, 업무 인수인계가 신속하게 마무리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이들, 함께 눈시울을 붉혀주는 이들, 개인톡으로 선물을 보내고 메시지를 보내 응원해 주는 이들의 마음이 줄줄이 이어졌다.
오랜 시간 남자들 틈바구니에서 상처받는 사람이라고 나를 규정하던 생각과 자격지심에 똘똘 뭉쳐있었던 내 비대한 자아의 껍질이 처음으로 물렁해졌다. 나만이 그들을 나의 동료라고 생각하고 있는 줄 알고 모든 일에 상처받았던 지난날을 돌이켜보니 결국 나를 그들의 동료로 인정하지 않은 이는 나뿐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남성 여성의 경계는 내가 몰랐던 사이에 이미 많이 흐려졌고 나는 그 사이를 이미 자유롭게 왕복하고 있었는 줄도 모르겠다.
명예남성이라는 망토를 걸치고 여성이라는 걸 부정하고 피해의식에만 집중했던 내가 난임여성이 되며 그 망토를 벗어던지니 오히려 마음이 가벼워졌다. 언젠가 임신이 되면 눈치는 보며 회사에서 입지 못하던 예쁜 원피스를 입고 배를 볼록 내놓고 사무실에 인사하러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출산과 후 회사에 복직하면 내가 이전보다 더 자유로운 나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도 생겼다. 취약함을 드러내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이전의 나보다 지금의 내가 조금, 아니 많이 내 마음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