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관 시술을 위한 난자채취는 수면마취로 진행된다. 회사 건강검진을 통해 위와 대장내시경을 수면 마취로 진행했던 터라 몇 차례 경험이 있긴 했다. 그래서 긴장이 줄어들었던 건 아니고 오히려 난자채취일이 다가올수록 긴장감은 고조되었다. 위내시경을 하면서는 거의 매번 수면마취에서 깨버리는 탓에 우엑우엑(저 마취 깼는데요.) 우웩우웨엑(저 주사를 다시 놔주시거나 호스 넣는 걸 조심스럽게 해 주시면 안 될까요) 하다가 극심한 목의 통증을 안고 검사를 마쳤고. 대장내시경은 (나)“저 화장실 가고 싶어요. 나올 것 같은데요.” 하면서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하다가 (간호사님) “환자분 이러시면 안 돼요. 누워계세요.” 하는 제지를 받으며 침대에 다시 눕혀지기를 반복했다. 가장 수치스러웠던 것은 이 모든 것이 기억난다는 것.
난자채취를 하면서 갑자기 벌떡 일어나 버리거나 몸부림치는 바람에 나의 난소가 크게 다치거나 하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 두려웠다. 그도 그럴 것이 유튜브, 블로그 등에서 찾아본 난자 채취 방법은 난자 하나를 채취하기 위해서 난소를 한 번씩 찌르는 것이라고 했는데. 만약 난자가 7개 정도 생겼다고 하면 나의 난소를 바늘로 7번 각각 찔러 난자를 뽑아내야 하는 것을 의미했다. 난소를 많이 찌르면 복수도 차고 부작용이 심하다던데 하는 무시무시한 난자채취 후기들을 인터넷 카페에서 찾아 읽고 나니 뒷골이 땅겼다.
병원에 도착해 잠깐 대기를 하다가 진료실에 들어갔다. 자궁 초음파를 통해 그동안 난포(난자를 품고 있는 풍선 같은 것)가 몇 개나 자랐는지를 보면서 대략적으로 채취 가능한 난자의 수를 알려주셨다. 나는 난포가 10개 정도 보인다고 하셨다. 뭉쳐져 있는 포도송이 같은 초음파를 보면서 어떻게 개수를 세는 게 가능한지 신기했다. 과배란 주사를 맞으면서, 코로나를 견디면서 난자가 자라지 않을까 봐 걱정했던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그러다가 난소를 10번 넘게 굵은 바늘로 찔러야 한다는 이야기구나 하는 현실감각이 돌아왔다.
난자채취를 하러 수술실로 안내받아 들어가면서 나는 간호사 선생님께 “수면마취에서 잘 깹니다. 수면마취가 잘 안 드는 것 같아요.” 하며 여러 번 나의 불안함을 전달하려고 했다. 돌아오는 답변은 환자의 안전을 위해 일정 몸무게당 투여할 수 있는 수면마취제의 용량이 정해져 있다는 말뿐이었다.
하의를 탈의하고 상의 위에 그대로 가운을 걸쳐 입고 안내받은 침대에 누웠다. 핸드폰을 볼 겨를도 없이 멍하니 천장을 보고 있으니 커튼으로 가려져있던 좌우 침대에서 말소리가 들려온다. “OO님 생년월일이 어떻게 되세요?” 하는 환자 확인 절차를 침대마다 쭉 해나가셨다. 86년생(나), 78년생, 90년대생인 환자가 얇은 커튼을 사이에 두고 누워있었다. 나도 묻는 말에 대답을 하고 다시 천장을 응시하며 누워있었다. 간호사 선생님이 내 옆 침대의 환자분에게 돌아와 말을 걸며 담소를 나눴다. 이번엔 난포 몇 개가 보이냐는 간호사 선생님의 질문, 난포 1개가 보였다는 환자의 대답. 이번에는 과배란 주사를 맞는 내내 너무 몸이 안 좋아서 쓰러질뻔했다는 환자의 이야기, 너무 고생하셨다는 간호사의 반응. 둘은 꽤나 오랫동안 서로를 봐왔던 것 같았다. 78년생 환자분이 이 병원에서 시험관 시술을 오랫동안 해온 고차수 환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를 포함한 나머지 1개 침대의 환자도 이 둘의 대화를 듣고 있겠지. 다른 환자들은 이번 난자채취가 몇 번째일까. 오늘 난자채취를 한 사람들 중 몇 명이 임신에 성공할까.’ 하는 생각을 하며 누워있었다. 나는 세 번째로 난자채취를 했다. 채취할 난자의 수가 가장 많은 사람이 마지막 순서가 되어 채취실에 가는 것 같았다.
난자채취하는 곳은 인공수정 시술을 했던 곳과 같았다. 수술실 같은 공간 안에 산부인과 굴욕의자가 차갑게 놓여있었고 수술복을 입은 간호사 선생님들이 나를 안내해 눕혀주셨다. 다리를 벌리고 의자에 앉자 의자는 형태를 바꿔 상체를 눕히고 다리를 위로 들어 올려주었다. 곧이어 담당 의사 선생님께서 수술실에 들어오셨다. 나의 왼손을 양손으로 꼭 잡아주시면서 다 잘될 거니까 너무 긴장하지 말라고 나를 다독여주셨다. 진료실에서 선생님의 다정함을 느끼긴 했지만 따뜻한 양손으로 나를 토닥여주시니 더 안심이 되었다. 선생님은 난자 채취 준비를 위해 소독을 시작하셨고 나는 곧 투여될 수면마취주사에 대한 안내를 받았다. 간호사 선생님의 설명을 모두 듣고 눈을 감으니 양쪽 눈꼬리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몰래 울고 눈물을 닦고 싶었는데 간호사 선생님이 나를 쭉 지켜보고 계셨는지 조용히 내 눈물을 닦아주셨다. 주사액이 주입되었고 나는 곧 잠에 빠졌다.
눈을 떴을 때는 회복실로 옮겨진 후였다. 곧이어 아랫배와 허리에 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누운 채로 무릎을 세우고 나니 허리와 배의 통증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간호사 선생님이 통증은 없냐고 물으셨고 나는 눈을 감은 채 너무 아프다고 말했다. 의사 선생님께 말씀드려 진통주사를 추가로 하나 처방받아오셔서 주사를 놓아주셨다. 통증이 가라앉길 기다리고 있는데 회복실 문이 열리고 선생님께서 들어오셨다. “몸은 좀 어때?” 선생님께서 물으셨다. “허리랑 배가 너무 아파요 선생님.” 하고 대답했다. 아직 몽롱함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았다. 선생님은 진통 주사는 더 처방해 주기 어렵다고 하셨고, 조금 더 누워있다가 진료실로 들려서 초음파를 한 번 다시 보자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오늘 난포 12개 중 난자는 총 8개가 채취되었다고, 그런데 모두 미성숙 난자들이어서 하루 정도 지켜본 다음에 오늘 채취한 남편의 정자와 수정시킬 수 있을지 봐야 한다고 하셨다. 나는 다시 말없이 끄덕거렸고 선생님은 조금 더 쉬라고 하시면서 밖으로 나가셨다.
잠결에 들은 이야기라 진짜인지 아닌지 긴가민가했는데. 미성숙 난자라는 말이 계속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난포 안에 있어야 할 난자가 없는 공난포와 난자가 채 크지 못한 상태인 미성숙 난자만은 피하고 싶었는데. 다행히 공난포만 있는 경우가 아니라 이번 시험관 시술 지원비는 어느 정도 정부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어 다행이었다.(난포 안에 난자가 전혀 없는 공난포일 경우 해당 차수의 정부지원은 취소되고 시술비는 모두 환자가 부담하게 된다. 물론 지자체별로 금액의 일부(소액)를 지원해 주는 경우도 있다.) 난포가 1~2개 보인다고 하셨던 78년생 환자분은 오늘 난자채취에 성공하셨을까.
몸을 일으켜 침대를 벗어나 탈의실로 갔다. 출혈은 없어서 다행인데 허리를 똑바로 필 수 없는 통증 때문에 몸을 구부정하게 굽혀 대기실로 나갔다. 남편이 조용히 나를 반겼다. 나는 통증 때문에 진료실에 한번 다시 들어갔다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소파에 앉아있을 수 없어 당장 눈에 보이는 긴 의자에 가서 거의 눕다시피 했다.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볼 힘도 없었다. 시간이 꽤 지나서 진료실에서 나를 불렀고 초음파를 봤는데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선생님은 나의 꼬리뼈 쪽을 주먹으로 퉁퉁 쳐보시면서 등 쪽이 울리듯이 아프냐고 물으셨다. 나는 괜찮다고 답했다. 가끔 난자채취를 하면서 난소와 가까운 곳에 있는 방광을 건드리게 되면 요로감염이 생겨서 비슷한 통증을 유발한다고 했다. 일단 먹는 진통제를 처방해 주셨다.
시험관 시술은 신선과 냉동으로 나뉘는데. 냉동 비용을 아낄 수 있는 ‘신선’의 경우 난자 채취를 하고 3~5일 이내에 수정되어 키워진 배아를 자궁에 이식하는 것이다. 나의 경우 미성숙 난자를 하루 더 성숙시키고 이후에 수정시켜 냉동을 거친 다음 날을 다시 잡고 해동해서 이식해야 하니 ‘냉동’으로 분류가 되었다. 오늘 계산해야 하는 금액은 공난포 채취, 미성숙 난자 채취, 냉동할 배아에 대한 비용이 모두 포함되었다. 정부지원 금액을 다 소진하고 수십만 원을 더 결제해야 했다. 이렇게 하고도 미성숙 난자가 잘 크지 못한다면 난자 채취 노력은 수포로 돌아간다.
자궁벽을 긁는 익숙한 생리통의 느낌과 배와 허리를 콕콕 찌르는 듯한 낯선 느낌이 섞여 불쾌한 기분으로 병원을 나섰다. 집까지 이제 다시 1시간 30분여를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데 막막했다. 괜찮냐고 물어보며 말을 걸어오는 남편에게 짜증을 냈다. 대답할 힘도 없었다. 병원비가 인공수정할 때에 비해 훨씬 많이 나왔는데 남편에게 그 이유를 설명하려니 속상한 미성숙 난자부터 공난포까지 설명해야 해서 더 기운이 빠졌다. 내 눈치를 보며 컨디션을 살피는 남편에겐 미안했지만 미간을 찌푸리며 “나중에. 나중에 말해.” 하고 말았다. 난자들이 부디 잘 버텨주길. 성공적으로 배양된 배아 한두 개라도 남아주길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