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 아메리카노 주세요.
얼음 많이요."
그날도 역시,
파워냉방에게 항복했어요.
원래는 걷는 사람이거든요.
집에서 도서관까지 한 시간 정도.
봄가을엔 그 시간이
산책이자 명상이었어요.
길가의 초록도 보고,
울긋불긋 단풍도 구경하면서
즐겁게 걸었죠.
한여름엔 이야기가 달라져요.
걷는 건 야무진 꿈이 되어버리고,
에어컨을 파워냉방으로 틀어주는 버스가
천국처럼 느껴지거든요.
한 달은 냉방을 즐기며 다녔지만,
내심 걸음으로 다니던 그 길이
그립더라고요.
비 온 다음 날,
아침 기온이 27도였어요.
'옳거니, 오늘은 걸어가자!' 했는데
이미 파워냉방에 익숙해진 몸은
40분 만에 시원한 음료를 찾고 있었어요.
길가 카페로 급하게 들어간 거죠.
주문을 하고 창밖을 보고 있는데,
할머니 한 분이 지나가고 계시더라고요.
아주 조심스럽게 걷고 계셨어요.
한 걸음에 한 뼘 정도씩
내딛으시면서요.
커피를 받아서
다시 자리에 앉았을 때도
여전히 지나가고 계셨죠.
그러다 갑자기 사라지셨어요.
넘어지셨거든요.
그 모습이...
고목나무가 쓰러지는 것 같았어요.
오래된 나무가 힘없이 뻣뻣한 채
그대로 넘어가는 것처럼.
잠깐이었지만 그 모습에 멍해졌어요.
얼른 정신을 차리고 달려나갔죠.
할머니는 넘어져 계셨어요.
당황하실까 봐 조심스레 손을 잡아
일으켜 드리자, 고맙다고 괜찮다고
가만한 웃음을 지어주셨어요.
그 미소가 얼마나 따뜻하던지요.
혼자 가실 수 있다고
다시 걸음을 내딛으시는 모습을
한참 바라봤어요.
카페에 들어와 창밖을 보다 보니,
할머니의 모습에서
내 미래의 모습이 겹쳐보였어요.
노인이 되어 걷는 것도
조심스러워진 내 모습.
작은 돌부리도 피하지 못하고
걸려 넘어지는 내 모습.
그럼에도 따뜻한 미소를
잃지 않는 내 모습.
이번엔 그 길로
초등학생 남자아이 둘이
뛰어가더라고요.
햇빛에 까맣게 탄 아이들.
왠지는 모르지만 신난 아이들.
꺄르르 우당탕탕 뛰어가는 아이들.
그 모습을 보자니
이번엔 나의 어릴 적 모습이 떠올랐어요.
뭐가 좋은지도 모르고 좋았던 그 시절.
같은 공간에서
미래와 과거의 나를 함께 만난 거예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시며 생각했어요.
뛰어가는 아이들처럼 한때는 그랬고,
조심스레 걸어가는 할머니처럼 언젠가는 그렇겠지.
몸은 뻣뻣해지겠지만, 마음은 부드러워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