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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Oct 24. 2024

추우면 추울수록 화려하게 피는 꽃, 섬유세닐말미잘

섬유세닐말미잘(Metridium senile)

나는 동해출신 다이버다.

다이버에게 출신 성분이 어디 있냐고 하겠냐만 다이버들과의 대화에서 ‘나 동해 출신이요’하면 경외의 눈빛을 받을 수 있다.  


-아니 한국의 바다에서 첫 다이빙을 하는 애국자라니!

-East sea! 아시아의 동쪽 바다라는 그 광활한 곳에서 다이빙이라니!

-그저 가족과 해수욕만 하던 바다를 직접 들어가는 용기가 있다니!


이런 말들이 터져 나온다면 참 좋겠지만, 틀렸다.


진실은


그렇게 춥고 어두운 바다를 처음 들어갔는데도 다이빙을 계속하다니. 미친 건가?이다. 바다의 도른자에게 ’경외‘가 아니라 ‘경계’의 눈빛을 보내는 것이다.



나의 첫 다이빙은 7월의 양양바다였다. 바다는 육지보다 한 계절이 늦게 오기 때문에 바다는 아직 봄이었다. 17도의 봄.


아마 꽤 추웠을 것이다. 첫 다이빙 후 이를 딱딱거리며 샤워실로 뛰어들어가 따뜻한 물에 몸을 녹인 기억이 있다. 그날은 추위보다 갑자기 벗겨진 오른쪽 핀과 급상승을 한 첫 바다 다이빙의 무서움이 커서 온도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하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러다 다시 가게 된 두 번째 세 번째 동해는 정말 추웠다. 5mm 슈트에 2.5mm 후드베스트까지 껴입어도 온몸이 얼음같이 굳었다. 입수하자마자 파리처럼 몸을 비비며 강사님께 엄지손가락을 乃 이렇게 치켜들었다. 좋아요! 가 아니라 물 위로 상승하자는 말이다. 이 짓을 돈 주고 왜 하나 싶었다. 그러다가도 설악산을 타고 내려온 끝내주는 바닷속 지형과 간혹 만나는 멸치 떼와 광어와 우럭과 멍게(왜 어째서 다 먹을 것인지)가 너무 반가워서 동해 다이빙이 할만하다고 생각했다.


다이빙이 끝나고 장비를 씻던 어떤 다이버가 말했다.


‘동해에서는 그걸 봐야 진짜 동해 다이버라 할 수 있지 지금 바다는 너무 따뜻해서 못 봐. ‘


두꺼운 장갑을 껴도 손가락이 잘려나가는 느낌으로 다이빙을 하고 있는데 이것보다 더 추워야 나오는 아이가 있다니. 생각만 해도 무서웠다.


‘아오 안 봐도 됩니다. 지금보다 추운 바다를 어떻게 들어가요. 안 해 안 해. 그러다 심장마비 올걸요. ’



이듬해에 그 친구를 보고야 말았다.


수온 14도. 호흡기를 앙다문 입술이 얼어붙는 것 같았던 그날, 발아래에 온통 하얀색으로 뒤덮인 꽃밭을 보았다.

말미잘동산

’섬유세닐말미잘‘이 잔뜩 핀 말미잘동산을 만난 것이다.  깊고 어두운 바다에 하얀 꽃밭이 갑자기 나타난 것 같았다. 기둥 위에 하얗게 보이는 촉수가 마치 솜사탕 같기도 하고 대형 콜리플라워 같이 보이기도 했다.

몸통이 길쭉한 섬유세닐말미잘

말미잘은 예민한 아이들이라 그 위를 지나다 물살이라도 맞으면 움츠러들기 때문에 조심해서 다가가야 했다. 그렇게 추위도 잊고 한참을 바라보다 바다를 나왔다. 육지에서 이들의 사진을 다시 보니 불과 몇 분 전인데도 다른 세계에 다녀온 것 같았다.  

조심스레 다가가는 초보 다이버 곡도

‘섬유세닐말미잘’

‘섬유’처럼 털 같은 촉수들이 뒤덮인 ‘세닐’(senile-영어 학명) 말미잘이다. 누가 이름을 지었는지 한국어와 외국어 학명을 섞다니 절묘하다. 근데 말미잘은 왜 말미잘이라고 하는 걸까


‘말미잘’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은 건 국민학교. 쿨럭 아니 초등학교 때였다. 마지막 승부라는 드라마의 한 장면 덕분이었다.

드라마 마지막승부(1994)/ 이종원과 신은경이 풋풋하다.

농구를 그만둔다는 이종원에게 신은경이 야이 바보 축구 멍청이 해삼 멍게 말미잘 같은 놈아!(진짜 저 대사였는지는 기억이 또렷하지 않지만 이런 비슷한 대사 끝에 말미잘이라고 한건 진짜다)라고 했고 이종원이 뭐 말미잘? 이러고 화를 내며 냅다 신은경에게 키스한다. 이게 무슨 말미잘 같은 전개인가. 어쨌든 어린 나는 말미잘이 얼마나 못생겼길래 이종원이 다른 욕은 다 듣고도 ‘말미잘’에 화를 냈나라는 생각을 했었다.


사진을 보니 이종원이 화낼만하긴 하다. 촉수가 숨겨진 말미잘은 똥구멍같이 생겼기 때문이다.

섬유세닐말미잘이 움츠러든 모습

그렇다. 말미잘은 똥구멍에서 유래한 말이다.


‘미잘’은 미주알의 줄임말이고 ‘말’은 신체 앞이나 무언가 큰 것에 붙이는 접두사로 쓴다.

그럼 미주알은 무엇이냐. 항문을 이루는 창자 끝을

가리킨다. (미주알고주알은 그래서 똥구멍 얘기까지 소소한걸 다 말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지혜로운 조상님들은 똥구멍같이 생긴 바다생물을 말미잘이라고 이름 붙이셨다.



다시 우리의 화려한 섬유세닐말미잘로 돌아와서


이 친구들은 추울 때만 촉수를 활짝 펼쳐서 먹이활동을 하기 때문에 수온이 올라가면 그 화려한 모습을 볼 수가 없다. 보통 15도 이하의 바다에서 촉수를 내어놓는다. 따라서 동해에서 이 친구들을 본다는 건 매우 낮은 수온에서 다이빙을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동해 다이빙을 할 땐 섬유세닐말미잘이 피었나 안 피었나로 추위를 가늠한다. 말미잘이 안 피었다고 하면 안도하며 아쉬워하고 피었다고 하면 두려워하며 기대한다. 변태와 성격이상자 사이가 이쯤 되겠다.


이제는 드라이슈트(몸 안으로 물이 들어오지 않는 따뜻한 다이빙 슈트)가 있기에 말미잘동산도 용감하게 다녀올 수 있어 변태성격이상자 다이버를 자처하지 않아도 되지만 그때의 설렘과 떨림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나에게 시리고도 아름다운 첫사랑인 동해.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 같은 섬유세닐말미잘을 내년 여름에는 다시 보러 가야겠다.


사진제공: 곰스쿠버

참고자료: 거의 모든 것의 바다(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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