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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쁜 그미 May 16. 2024

나는 나를 잘 안다는 착각

괜찮은 취미인지 아닌지, 한 번도 해본적 없는 내가 알아?

소개팅을 했다는 직장 동료들의 후기를 가끔 듣다보면 상대를 상당히 빨리 판단하고 있다는 것에 새삼 놀라게 된다. 싫은 점을 단번에 발견했을 수도, 외형적인 면을 보고 판단했을 수도, 특정 말 한마디가 신경쓰였을 수도 있겠지. 실은 나도 사회생활 초반에는 인사팀 경력 버프를 받고 '나는 사람을 많이 마주하다보니 빠르게 파악하는 편이다'하자부심이 있었던 때도 있었다, 이제와 부끄럽지만서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과정에서 종종 "○○ 좋아하세요?" 라는 질문을 받게 된다. 이 질문의 답변을 통해 나의 취향을 정의 내리는 순간, 어떤 사람은 그 소재에 대한 이야기를 최대한 절제하거나 다른 소재를 찾으려 노력하는 것 같다.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게 아닌 것 같아서 한 대답이지, 이야기하기 싫다거나 관심도 없다는 말은 아니었는데... 그 후로는 초면에 취향을 대답할 때는 신중해졌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나이나 직업도 프레임이 되어 나를 가두는 것 같다. 혈액형별 성격 유형이 유행했던 시절, 누군가가 혈액형을 물으면 나를 정의내려버리는 것이 싫어서 "맞춰보세요!"를 시전하기도 했었다. 요즘엔 그게 MBTi이려나.

상대가 나의 어떤 대답들로 인해 나를 '열심히 사는 사람'으로 느끼기 시작했다면 그 때부터 상대는 본인이 정의한 열심히 사는 모습의 프레임을 나에게 대볼 것이다. 내가 그런 삶을 추구하고는 있지만 사실 게으른 면도 있고 어설픈 면도 많은데, 그 사람에게 나는 "모든 것에 열심인" 사람으로만 그려지는게 염려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상대가 나를 더 알게 되면서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의외로 허당이네", "은근히 빈틈이 있네"이다. 이렇게까지 나를 더 알아봐준 것도 대단하다. 누군가는 '이 사람은 너무 바쁘고 빈틈이 없어보여'라며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아 나와 일찌감치 멀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40년 가까이 살아도 나 자신을 모르겠는 때가 허다한데, 타인과의 한두시간 대화를 통해 그 사람을 정의한다는 것은 목차만 읽고 책의 한줄평을 쓰는 것과 같지 않을까.



나는 1년 반 전에 직업을 바꾸어 인사팀의 커리어를 살려 컨설턴트가 되었다. 과거는 '내가 속한 인사팀 vs 나의 내부 고객인 임직원'의 관점에서 보았기 때문에 임직원 개개인에 대한 관심과 관계 유지에 대한 의무감이 컸다. 특히 직급이 오르면서는 팀원급들의 커리어나 팀장급들의 멘탈에 특히 신경을 많이 썼다. 사업부에 와서 처음에는 그 역할이 사라진게 어색하고 이상했다. 그렇지만 더 이상 인사팀도 팀장도 아니면서 동료들 모두를 신경쓸 수는 없는 법. 그래서 조금은 마음을 놓고, 내 마음이 가는대로 회사 생활을 해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사업부에 들어와있는 나를 몇 달 간 지켜보니, 나는 원래 타인을 염려하고 관계를 유지하는 활동을 즐겨하는 사람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인사팀에서는 직원들한테 부당한 일이 발생하거나 운영 방식이 법령에 어긋난 경우에 내가 먼저 나서서 이야기하고 일이 제대로 흘러가게 설득하는 역할을 많이 했는데, 사업부에서는 내 프로젝트만 잘 끝내면 되니 현 상황을 거스르는 주장을 할 상황 자체가 없어져서 마음이 평화로워졌다. 인사팀 과장 시절, 총무팀 대리 남직원이 날더러 "세다"고 표현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 한 동안 마음앓이를 했었다. 사실 난 그런 역을 자처하는 사람은 아니다. 물 흐르면 흐르는대로 그냥 떠가고 그러다 물이 마르면 마른대로 엉덩이 털고 그냥 걸어가는 사람이지만, 일을 제대로 되게 하는 게 내 역할이었기 때문에 목소리를 냈던 것이다.

또 다른 발견도 있었다. 인사팀에 있을 때는 메일, 메신저, 찾아오는 직원, 임원의 부름이 수시로 발생하기 때문에 업무에 집중하는 시간은 짧고 잦았다. 난 그냥 내가 멀티태스킹이 잘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그 상황을 즐겼었다. 지금은 1인 프로젝트의 비중이 높고 프로젝트를 함께 하더라도 각자의 역할만 잘 끝내면 되니 날 찾을 사람은 거의 없다. 이렇게 일에 집중하는 시간의 밀도가 굉장히 높아지면서 나는 업무의 능률이 더 올랐고 일을 더 즐기게 되었다. 그리고 사실은 멀티태스킹을 선호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난 몇 시간이고 앉아 집중을 유지하는 그 느낌을 좋아한다. 생각해보면, 평소에도 나는 방해받는 것을 싫어해서 모든 앱의 알림을 꺼놓는 편이다.


왜 여태 이런 것들을 생각한 적이 없지? 자문했지만 그리 이상할 일도 아니다. 11년을 그런 환경에서, 그래야 하는 업무를, 그 페르소나를 인생의 중심에 놓고 살아온 나이기에. 그냥 나는 '사람들 케어하는걸 좋아하고 사람들 이야기 듣는걸 좋아해서 인사팀에 입사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살았는데, 이런 옛 기억도 이제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이 쯤에서 취미를 떠올려본다. 해보지도 않고 나랑 안맞는다고 생각한 무수한 활동들이 있다. 예를 들면 러닝이 그랬다. 난 더운게 싫고, 힘든게 싫고,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운동은 지루하다, 고 몇 번의 경험들로 인해 스스로를 이런 프레임 안에 살게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떠한 사유로 동네 러닝을 한 번 해보고서는 생각이 180도 바뀌었다. 덥긴한데, 엄청 개운하다. 힘든건 인터벌로 조절하면 되고, 힘든 게 점점 나아지는걸 보면서 스스로 체력이 늘고 있음을 느껴 그게 또 쾌감이 된다. 길을 뛰는 것은 한 걸음 한 걸음이 새로워서, 이 길의 어제와 오늘은 또 다른 모습이라서, 내가 지금 같은 곳에서 같은 동작을 반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는다.


만약 지금 내가 나에게 씌운 프레임이 있다면 당장 벗어버려야 나의 최적의 취미활동을 찾아내는 데에 더 좋을 것이다. 예를 들면, 

- 난 끈기가 없는 것 같고 뭘 해도 금방 싫증낼 것 같다: 나에게 잘 맞는 무언가를 찾으면 오래도록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브런치도 9주째 연재하고 있고 아직도 소재를 떠올리고 있잖아?

- 난 똥손이라 그림을 못 그린다: 꾸준히 연습하면 잘할지도 모른다. 어릴 적에 애니메이션을 멈춰놓거나 만화책을 펴놓고 따라 그리는것은 곧잘 했는데. 그리고 세상에 꾸준히 해서 못할게 어딨어.

- 평소에 악상도 잘 떠오르지 않는걸 보면, 작곡에는 영 소질이 없을 것 같다: 이건 충분한 샘플이 없어서 아직 모르겠다. 확인이 필요하다! 


편견 없는 다양한 활동들은 여태껏 나도 몰랐던 새로운 '나'를 발견하게 도와줄 것이다. 두근두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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