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눈을 팔게 만드는 매력, "재미"
벌써 사이버대학교 첫 학기의 마지막 주차이다.
취미로 작곡을 해보면 어떨까 하여 요즘 음악 공부를 하고 있는데, 사설 음악학원보다 가성비와 집중도가 좋아보이는 사이버대학교 실용음악과에 편입해서 첫 학기를 수강하고 있다. 나는 잊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정식 학사를 취득할 수 있는 엄연한 대학 교육 과정이라는 것을...
처음에 수업 밀도와 과제 양에 깜짝 놀랐다. 십 수년 전 대학교에서 들었던 3학점짜리 강의를 떠올려보면, 대부분 한시간 반씩 2회로 쪼개져있었다. 수업 시간에는 교수님께서 어제 있었던 일이나 젊은 시절 추억담도 늘어놓으시고, 교재의 본문을 소리내어 읽으시거나 (혹은 읽어보라고 하시거나),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지기도 하고, 지난 시간 수업 복습도 하고, 애들이랑 대화도 하고, 쉬는 시간도 넉넉하고, 날이 좋아서 일찍 끝내주고(?)... 그랬는데, 사이버대는 녹화된 강의를 보는 것이라서 이런 틈이 하나도 없다. 강의 시간은 90분에서 130분 사이이다. 한 번 듣고 배울 양이 상당히 많다고 느껴진다.
특히 건반 수업은 거의 손을 놨는데, 14주 동안 도레미파솔라시도(Scale)에서 시작해서 3화음, 7화음을 거쳐 Mode에 Tension까지 하고 끝나는 과정이다보니, 연습 시간이 충분해야 따라갈 수 있다. 이 수업 하나만 들었다면 하루 한 시간씩 연습해서 쫓아갔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한 학기에 최소 12학점(4과목)은 들어야하는데다가 모든 과목에 시험, 과제가 있다보니 만만치 않다. 특히 건반 과제는 악보를 보지 않고 3분 가량의 연주를 촬영하여 제출하는 것이고, 나는 원래 외우고 있던 곡도 하나도 없어서 적당한 난이도, 적당한 길이의 악보를 선정하는 데에만 퇴근 후 하루 저녁을 다 썼다. 요즘은 외워서 틀리지 않게 연주하기 위해 밤마다 피아노 앞에 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다. 수업 내용 연습은 당연히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러한 속도가 싫다는건 절대 아니다. 수업도 좋고 자료도 좋아서 열심히 연습만 한다면 재즈피아노의 기본기를 빠르게 잡아갈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여름 방학 때 다시 들으면서 열심히 연습을 해보려고 생각 중이다.
사실 내가 흥미를 느낀 부분은 다른 과목의 과제를 하다가 튀어나왔다. 한 음악 장르에 대해 심층적으로 자료 조사를 하여 레포트를 써야하는 과제가 있었는데, 이 레포트를 쓰는데 시간을 상당히 많이 할애했다. 우선 나는 장르를 구분해가며 음악을 듣는 편이 아니고 특별히 선호하는 장르라고는 미국의 컨트리 음악 뿐이다. 그렇다보니 과제하기 적절한 장르를 선택하는 것에도 갈팡질팡했고, 자료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에는 번역기가 필수였다. 과제를 할 장르는 내 인생에서 나름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하는 '시부야케이'를 선택했는데, 이것을 파면 팔수록 빠져드는 것이었다. 관련 논문부터 웹진, 뮤지션 인터뷰, 서양 평론가의 글과 유튜브의 다큐까지, 요즘엔 외국 논문도 검색과 접근이 쉽다 보니 자료는 꽤 많았다. 그걸 몇 일에 걸쳐서 보다가 지칠 즈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 나 이거 왜 이렇게까지 열심히 하는거냐...
지난 이야기를 요약해보자면, 나는 나에게 적합한 취미 활동을 찾는 중이었다. 그러다 과거에 청춘을 바치다가 뒤끝없이 떠나보냈던 '작곡'을 떠올렸고, 작곡을 제대로 해보기 위한 기본 지식을 빠르고 정확하게 얻어보려고 사이버대를 수강하고 있었다. 냉정하게 얘기하면 중요한건 수업 내용 중 작곡에 도움이 될만한 것을 흡수하는 것이지, 출석과 과제를 잘 해서 좋은 점수를 받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학비가 비싼 것도 아니라서 예전처럼 장학금이 간절하지도 않다. 그런데 왜 이렇게 열심히 하는 것인지 스스로도 웃겼다.
이 질문의 끝에 내가 낸 답은 심플했다.
- 그냥, 재밌음.
자료를 수집해서 정리하는게 재미있었던 건지, 시부야케이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알아가는게 재미있었던 건지, 그걸 글로 정리하는게 재미있었던 건지, 아니면 단순히 기한이 주어진 일을 최선을 다해 처리하는 것이 재미있었던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내가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재미를 느꼈다는 것이 스스로에게는 상당히 흥미로운 지점이었다.
피아노도 마찬가지다. 초반에는 수업을 따라가기 위해 저녁에 한두번 연습을 하긴 했었다. 그러던 중 손가락 골절이 생기면서 한 달 가까이 피아노를 칠 수가 없었다. 수업은 못따라가겠다는 압박이 들 즈음 과제가 모습을 드러내었고 그 후로는 줄곧 연주곡을 연습했다. 사실 중요도를 따지자면 나는 수업을 따라갔어야 맞는데, 진도보다 의무감이 있는 과제를 선택했다. 문득 들었던 생각이, 과제가 아니었으면 내가 악보를 외워서 연주해보겠다고 이렇게 열심히 연습을 했을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것도 충분히 재미있다.
나는 내가 피아노 치는 것을 싫어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어릴 적 피아노 학원 선생님은 수첩에 하농, 소곡집, 소나타, 체르니에 각각 4~5개의 도형을 그려주시고는 연주한 횟수만큼 색칠해오라는 숙제를 내셨다. 그게 너무 싫어서 종종 학원가는 길에 수첩을 꺼내어 죄다 색칠해버리곤 양심의 불쾌감을 느꼈었다. 마찬가지로 이 과제가 싫었다면 "졸업 안해도 돼"라며 합리화하고 무시하거나, 악보 보고 더듬거리며 적당히 연주한 영상을 제출하면서 제출 자체에 의의를 두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쓰기 싫고 부담스러웠던 레포트는 흥미롭고 훈훈하게 마무리를 했고, 연주곡도 곧 제출을 한다. 내 취미로 작곡이 좋을지 피아노 연주가 좋을지는 (설마 레포트...) 아직 잘 모르겠지만, 취미를 찾아나가는 여정으로 인생이 더 재미있어지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