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정의와 역할에 대한 정상적인 혼란
초등학교를 다니던 무렵 엄마는 놀이동산 내 한식당에서 근무를 했다. 사내직원에게 나오는 자유이용권으로 친구들과 자주 놀이동산을 드나들었다. 어느 날 엄마는 나에게 Y를 소개했다. 하얗고 마른 몸에 서글서글한 인상을 가진 사람이었다. 뭉글어지는 말투와 꽤나 밝은 목소리를 지닌 그는 이제 막 서른이 넘어가는 나이었고, 자신을 '삼촌'으로 부르라고 했다. Y는 엄마와 같은 한식당에서 근무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나와 친구들이 좋아할 만한 분식점으로 데려가 식사를 챙겨주었다. 젊고 밝은 기운이 넘쳤던 그에게 호감이 생겼다.
Y는 엄마와 함께하는 시간에 종종 나를 끼워 시간을 보냈고, 나의 날카로움과 새초롬한 말들을 꽤나 재치있게 받아주던 사람이었다. 그와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우리 가족의 경계는 조금씩 허물어졌고, 자연스럽게 우리 가족의 공간에 그가 들어왔다. 하루 이틀씩 그가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만큼 나는 그와 더 가까워졌고 때로 엄마가 없는 시간을 그와 둘이 보내도 어색하거나 낯설지 않았다. 어쩌면 비어있던 아빠의 자리를 그가 채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 즐겁기도 했다.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갔고 자연스럽게 Y와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가면서 나는 Y의 역할과 위치에 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엄마가 사랑하는 사람, 그러나 나의 가족은 아닌 사람. 나의 가족은 아니지만 한 집에서 함께 생활하는 사람. 어린 나는 겉으로 우리의 모습이 타인에게 핵가족으로 보일 수 있다는 지점에서 작은 안심을 했다. 하지만 당당하게 그를 '아빠'라고 소개할 수 없다는 지점에서 실망감을 느끼기도 했다. 엄마와 Y의 동거를 통해 구성된 가족형태가 불안정하고 비정상이라는 생각을 했다. Y의 존재가 떳떳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와 나는 혈연으로도 법으로도 묶여있지 못한 완벽한 타인이었다.
당시의 나는 Y를 무엇으로 정의하고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을지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를 설명해준 사람도 없었다. 그저 상황을 마주하고 적응하는 것 밖에 방법이 없었다. 오랜 시간 내 안에 가득했던 질문들이었지만 이것을 풀어낼 수 있는 지식과 수단을 갖지 못했다.
페미니즘을 만나고 내가 겪어온 경험들이 다양한 경계를 인식하고 상상의 지평을 넓혀주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의 내가 Y의 역할과 위치에 대해 혼란을 가졌던 것은 정상적인 혼란이었다. 그런 혼란을 통해 내가 왜 이러한 가족형태를 비정상으로 느껴왔는지, 가족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혈연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이해하고 반문할 수 있는 기틀을 페미니즘을 만나 얻었다.
핵가족 문화 안에서 경계를 벗어나 본 사람과 이러한 경험을 벗어나 보지 않은 사람과의 차이는 분명하다. 이러한 경험이 절대적인 척도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에 도전하고 다른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점에서 경험이 주는 차이와 중요성은 명확하다.
어떤 합의와 예고도 없었던 Y와 엄마의 동거는 지금으로써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지금의 나는 성인이 된 나의 자리에서 과거의 일을 회상하며 분노와 불쾌감을 느낀다. 어린 내가 의지할 수 있던 존재는 엄마 하나뿐이라서 엄마의 선택에 반대의 입장을 낼 수 없었다. 미성년자였던 나는 혼자서 경제적인 독립을 할 수도, 한 명의 주체로서 선택권을 누릴 수도 없었다. 엄마가 모두를 불편하고 아프게 하고 힘들게 하는 선택을 결정할 때도 반대의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딸의 입장에서 나는 엄마의 선택에 대해 분노를 느끼지만 '딸의 입장'이라는 내 시선에서 엄마의 선택과 삶을 함부로 독해하는 것이 얼마나 오만한 것인지도 안다. 당시의 엄마 또한 이러한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여유와 지식이 없었을 것이고, 엄마는 엄마의 욕망에 충실했을 뿐이다.
글을 써 내려가며 어린 나에게 연결되고 잊고 있던 기억들을 복기하며 나는 분노를 느낀다. 동시에 엄마가 가여워진다. 엄마 또한 기대고 싶은 사람이 필요했을 것이다. 젊은 엄마 또한 누군가의 곁이 필요했을 것이다. 엄마만을 바라보는 두 아이에 대한 부담이 가득했던 집이라는 공간에 누군가의 사랑과 따뜻함을 채워 넣고 싶었을 것이다.
엄마와의 관계를 되돌아보는 것. 특히 '어린 나'와 '당시의 엄마'를 '현재의 나'의 시선으로 써 내려가며 분노를 느끼고 동시에 엄마가 가여워지는 이 모순 가득한 나 자신의 감정이 답답하다. 달라지지 않는 한 가지는 엄마를 한 명의 사람으로서 존중하고 이해하고 싶다는 것. 너무 밉지만 또 너무 사랑하는 존재라는 것. 그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