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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초록 Oct 23. 2021

7화. 배고픔과 갈증을 당신은 얼마나 참을 수 있나?

대국민팀플: 고양이 급식소 공적 영역 편입

대국민팀플

브런치북 9회 응모작

7화. 배고픔과 갈증을 당신은 얼마나 참을 수 있나?      




나는 도로 위에서만 성호를 긋는다 

  운전을 늦게 시작했다. 이제 막 3년차다. 서울 출퇴근길, 위협적인 이륜차, 강남, 과적 화물차를 제외하면 운전은 즐겁다. 기동력이 생긴 일상도 맘에 들지만 일단 주행 자체를 좋아하는 편이다. 실은 한 평생 자동차를 몰고 싶어 안달이었는데 ‘김여사’ 토크가 만연한 사회 분위기에 지레 겁을 먹어 늦었다. 도로 위에 희로애락이 있다더니. 직접 운전대를 잡아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반짝이는 한강 야경의 일부가 되어 아름다운 여름밤을 달리는 순간은 즐거움이 크다. 서로 양보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차들로 난장판이 된 퇴근길 도로 한복판을 지켜보는 순간에는 분노가 끓는다. 그래도 그뿐이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그 자리를 바람처럼 휙 뜨고 나면 그만이었다. 운전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다. 제자리를 맴돌지 않아도 된다는 것. 내 두 다리로는 불가능한 속도로 나를 제자리에 고여 있지 않게 해주는 것. 쉽게 떠날 수 있고 쉽게 멀어질 수 있고 모든 순간을 찰나처럼 여길 수 있다는 것. 불쾌한 마음이 들거나 쉽게 들뜨고 기꺼워지더라도 그 순간, 그 자리로부터 멀리 달아나 언제나처럼 돌아온 내 자리에서 시동을 끄고 엔진이 식으면 그 마음도 같이 식힐 수 있다는 것. 그 사실들이 내게는 운전의 미학이었다. 일탈. 달리는 동안에만 오롯이 고조되었다 일상으로 돌아오면 사라지는 그 일탈감이 좋았다. 그래, 다 좋다. 영영 사라지지 않는 슬픔 딱 하나만 빼면.  

  길 위에는 죽은 동물들이 많다. 너무 많다. 도시에서는 주로 작은 고양이들이다. 어느 작가가 그랬다. 글을 읽고 감정을 느끼는 일은 독자들의 것이라 쓰는 이가 먼저 슬프고 먼저 화내고 먼저 기쁘지 않는 게 좋다고. 독자들을 위한 감정의 여백을 남겨두는 것이 쓰는 이의 미덕일 것이라고. 노력해보려고 하는데 쉽지 않다. 벌써 또 눈물이 날 것 같다고 써버리면 훌륭한 글을 쓸 수 없게 되는 걸까. 이미 울고 있다고 쓰면 이 글은 미리 망한 셈일까. 그래도 난 모르겠다. 망하고 말지. 도로 위에서 참았다가 지금 우는 거라고 항변하고 싶다. 도로에서는 도로 교행을 원활히 할 의무가 하찮은 운전자 1인 나에게도 있는 바람에 목 놓아 울고 싶어도 울 수가 없다. 죽은 아이를 보고도 그냥 지나쳐야 하고 제때 발견을 못하면 밟고 지나가야 한다. 이미 고통 속에 죽어간 아이를 두 번 죽이고 백 번 죽이고 천 번 다시 죽여야 한다. 주거 단지, 상가 등과 인접한 동네의 도로에서 로드킬 당한 아이를 보아도 마음이 찢어지지만 대체 어디를 통해 어떻게 올라왔는지조차 모르겠는 고가도로 위에서 죽은 아이를 볼 때는 마음속으로조차 말을 이을 수가 없다. 대체 왜 여기까지 왔느냐고, 무얼 찾아 얼마나 헤매다 여기까지 왔냐고, 지금 천국으로 가고 있느냐고, 길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미안하다고.. 듣지도 못할 아이에게 울먹이며 말을 건네는 것이 고작이다.

  나는 무교다. 종교를 가져본 적이 없어서 제대로 기도하는 법도 모른다. 푸른 달, 무성한 고목 아래서 소원 비는 법이나 알 뿐이다. 다만 인생에서 딱 한 번, 얼렁뚱땅 혜화동 성당의 미사에 참여한 일이 있다. 성호 긋는 법은 그때 배웠다. 운전 중에는 두 손을 붙여 기도할 수 없다. 적어도 한 손은 핸들 위에 있어야 하니까. 그래서 성호를 긋기 시작했다. ‘이생에서 굶주리고 목마르고 온갖 질병에 고통 받는 것이 안타까워 하늘이 하루라도 빨리 데려가신 거라고 생각하자, 생각하자, 그렇게 생각하자.’ 그렇게 되뇌며 친구들도 먹을 것도 천지인 무지개별에 무사히 도착하기를 빈다. 고양이들을 그렇게 하늘에 보낼 때, 그 외에는 환자를 싣고 병원으로 달려가는 구급차의 뒷모습을 볼 때. 나는 그렇게 도로 위에서만 성호를 긋는 사람이 되었다. 각자 제 갈 곳을 잘 찾아가기를 비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순간들이다.        


도시는 누구의 것인가

  고양이는 영역 동물이다. 영역 다툼에 실패해서 다른 고양이들에 의해 밀려나는 경우, 인간의 해코지를 피하기 위한 경우 등을 제하면 낯선 공간을 극도로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고양이의 이동은 8할이 먹을 것과 마실 것 때문이다. 생명이 그 때문에 죽어야 할까. 먹고 마실 것이 넘쳐나 쓰레기 처리에 골머리를 앓는 대한민국 구석구석에서 생명들이 단지 먹고 마시지 못하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우리들의 눈앞에서 처참히 죽어가야 할까. 대한민국은 그조차 해결하지 못하는 나라여야 할까.

  운전을 시작하고 채 3개월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늘 다니던 영화관에서 심야영화를 보고 집에 돌아가는 익숙한 길이라 미숙한 운전 실력에도 주변을 살필 겨를이 있었다. 6차선 대로였다. 우회전 차로는 비어 있고 애초에 차가 많지 않은 밤이라 직진 신호를 따라 천천히 달리는 중이었다. 대로변 가로등 아래 얼룩 고양이 한 마리가 보였다. 작은 발을 도로로 내놨다가 다시 보도로 들여놨다가를 반복하고 있었다. 길을 건너고 싶은데 겁을 먹고 못 내려오는 중이었다. 나는 전날에도, 그 전날에도 로드킬 당한 고양이를 보았다. 속이 뒤집어지던 차였다. 살아있는 아이는 어떻게든 살리고 싶었다. 놀라서 도망가느라 도로에 뛰어들지 않게 아주 천천히 차선을 변경하고 가로등에서 더 멀찍이 가서 차를 세웠다. 고양이는 내가 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 보도 안쪽으로 길을 틀어 나를 경계하는데 집중했다. 도로로 나가겠다는 생각은 일단 접게 한 것 같아 다행이었다. 트렁크를 열어 늘 챙겨 다니는 일회용 그릇에 사료를 부어 셔터 닫힌 상가 구석에 놓아 주고서 다시 차로 돌아와 숨었다. 나를 피해 숨었던 고양이가 다시 나와 주변을 몇 번 두리번거리더니 허겁지겁 그릇에 그 작은 머리를 박고서 밥을 먹었다. 불안한지 몇 번은 더 주변을 살폈지만 계속 먹었다. 한참을 먹고 또 먹었다. 깜빡이를 켜고서 나도 그 자리에 오래 있었다. 양껏 다 먹었는지 고양이는 상가 뒷길로 사라졌다. 건너려던 대로변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서. 녀석은 그저 배가 고팠던 거다. 주린 배를 채우면 제 영역을 떠나지 않아도 되었던 거다. 그릇을 치우고 트렁크를 닫고 안전벨트를 매고 나도 다시 시동을 걸었다. 그날만큼은 두 다리를 뻗고 잤다. 그렇게 눈앞의 고양이를 살릴 수 있는 날은 드물다. 그날의 나도 녀석도 하루치만큼 운이 좋았다. 그러나 내일의 운명이란 또 모르는 일이다. 무사할 거라 장담할 수 없다. 그 사실을 견디기가 힘들다. 먹고 마시는 문제를 해결한다면 분명 죽어가는 생명이 줄어들 것이다.

  애초에 도시는, 도로는, 이 땅은 누구의 것인가. 운전하다가 동물이 나타나면 도로 교통의 흐름을 방해하다 큰 사고로 이어지지 않게 해야 하므로 핸들을 꺾어 휘청이거나 급브레이크를 밟기보다는 그대로 동물을 치고 지나가야 한다는 조언을 많이 들었다. 맞는 말 같으면서도 이상하다. 그럴 권리를 인간에게 부여한 것은 누구일까. 동물을 살리면서 인간도 운전대를 잡을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 구현하거나 그게 안 되면 운전을 하지 말았어야 하는 거 아닐까? 계속 문명의 이기를 누리고 싶다면 안간힘을 다해서 도로 위에서 죽어가는 동물들을 살리기 위한 노력을 동반했어야 한다.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고 누릴 것만 누리고 싶다면 우리는 ‘적극적 살생’에 가담 중인 것이다. 우리가 편리를 얻기 위해 다른 생명을 해쳐도 괜찮다는 것은 대체 어느 시대에 약속된 사회적 합의인가.

  신분제 사회인 사극을 보면 그런 장면이 가끔 나온다. 귀족이나 왕족이 윤기가 흐르는 말을 몰아 장안을 달리다가 사람을 친다. 그때의 사람이란 주로 행색이 남루하고 신분이 천한 자다. 다쳐도 모르쇠, 죽어도 모르쇠다. 귀한 분이 가시는 길을 막아섰다 해서 이미 다친 채로 매나 더 얻어맞지 않으면 다행인 것이다. 신분제가 사라진 오늘날 현대인인 우리는 그런 장면을 보면서 귀족과 왕족을 욕한다. 말에 걷어차인 노비, 천인이 그런 일을 당해도 괜찮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모두 동등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격체로서의 인간은 누구나 존엄하고 존중 받아야 한다고 뼈에 새기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한 것이 현대사회이므로 이걸 모르는 이는 없다. 그렇다면 동물은 어떤가. 인간과 동물은 신분이 다른가? 동물은 우리를 위해 노역하는 존재, 천한 존재인가? 배고픔과 갈증에 시달리다 죽어가도 좋은 한낱 미물에 지나지 않는가? 의무교육과 고등교육을 포함해 19년째 학교에 다니고 있지만 그에 대한 답을 배운 적이 없다. 동물과 인간은 어떤 관계인지. 아, 조지 오웰의 동물 농장이나 읽었을 따름이다. 필독 도서에 그게 들어는 있었구나 싶다. 그 외에는 얻은 깨달음도 배움도 없었던 것 같다. 이제라도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 동물이 자생할 수 있는 자연을 우리가 빼앗은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먹이를 얻고 집으로 삼을 것들을 모조리 베고 자르고 태워 인간의 자본과 공간으로 삼고 욕심을 채웠으면 적어도 남은 생명들에게 밥은 먹이고 목은 축이게 하며 비와 추위는 피하게 해주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우리, 참 잔인하다. 가끔은 내가 인간인 것이 싫다.


이제 문제 해결을 하자

  아파트, 빌라, 상가, 공원 … 고양이는 어디에나 있다. 어차피 어디에나 있다. 누가 애써 밥을 챙겨 주더라도 굶주린 동물 전수를 구휼할 수는 없다. 그러니 배가 주린 동물들은 계속 있을 수밖에 없다. 어디는 누가 밥을 챙겨줘서 고양이들이 들끓는다 하지만 또 어디는 밥을 챙겨주는 사람이 없어서 고양이가 쓰레기장을 뒤지는데 그럼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하나? 배고픈 고양이들은 떠돌게 되고 결국 떠돌다 보면 모두의 집 앞에 어차피 또 온다. 굶주린 아이들은 살기 위해 쓰레기봉투를 찢고 인간들이 먹고 남기고서 뒤처리도 제대로 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버린 치킨 뼛조각이라도 먹어보려고 애를 쓰다 뼛조각이 위장에 걸려 죽어간다. 아침에 집 앞 쓰레기장에서 흩어진 치킨 뼛조각들을 한 번이라도 본 적 있다면 알 것이다. 인간은 그 광경을 일말의 불쾌감으로 묘사하고 말 뿐이지만 실은 그건 굶주림에 허덕이는 생명의 몸부림이라는 걸. 굶지 않게 해주면 찢어진 쓰레기봉투도 흩어진 치킨 뼛조각도 볼 일이 없다. 고양이는 깔끔하고 영리한 동물이다. 더럽고 해로운 걸 본능적으로 잘 아는 동물이다. 그 외에 연명할 먹을거리, 마실 거리가 있다면 절대 냄새 나고 낯선 쓰레기장을 뒤지지 않을 거란 얘기다. 현존하는 생명들을 공식적으로 배불리 먹이고 마시게 해주고 괜히 밥에 약 타서 동물들 죽이는 범죄자도 그만 양산하고 건강한 계절에 중성화 수술 잘 해주어서 개체 수 조절도 하고 양지에서 체계적으로 도시의 동물들을 케어해서 사람들이 동물들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풍토를 만들고, 그 일원인 약자를 해치는 이들은 엄벌에 처하고. 여기서 맘에 안 드는 게 뭘까? 저런 도시에 사는 게 나쁠까? 누구에게 무엇이 나쁠까? 정말 궁금하다.

  국회의원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왜냐고 누가 묻길래 대답도 했었다. “고양이들 밥을 주고 싶어. 굶지 않게 해주고 싶어. 애초에 건물을 올릴 때 급식소를 둘 자리를 마련하게 하고 싶어. 공공기관 관내, 학교, 병원, 산책로, 개인 사유지, 거주단지, 상가 … 제 영역에 먹을 게 없어 다른 곳 찾아가다 죽지 않을 수 있을 만큼 밥자리를 만들어 주고 싶어. 그리고 그게 사회적 합의를 이뤄서 법의 영역으로 편입되게 하고 싶어. 나라가 이 나라에 생명 있는 것들을 굶기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 말을 들은 친구는 손을 내저었다. “절대, 그건 절대 안 돼. 100년이 지나도 국회 입성 못해 그걸로는. 그냥 딴 거 해.” 정말 안 될까? 고양이 밥은 좀 주고, 먹을 것 찾아 헤매지 않게 하고, 그러다 죽지 않게 하고, 멀쩡한 강아지들 잡아가고 훔쳐가서 잔인하게 도살해서 잡아먹지 말고, 동물을 물건이라고 하지 말고, 애초에 제 것도 아닌 동물의 생명을 팔아서 자본을 얻으면서 그 과정에서 한 푼이라도 더 아껴보자고 살아 있는 동안에 공장형 사육하는 일 좀 멈추고 … 그게 왜 안 되는 일일까?

  고양이 급식소를 공적 영역으로 편입시키고 싶다. 범국가적으로 법을 먼저 바꾸어서 민간에 적용하는 일이 요원하고 어려운 일이라면 전국을 다 뒤져서라도 마음 맞는 지자체장 딱 하나만이라도 찾아내면 좋겠다. 도시가 작든 크든 상관없다. 어느 섬이어도 좋다. 어디든 갈 테다. 그 뜻에 공감해주는 그 도시의 시민들과 함께 온 세상을 향해서 보여주고 싶다. 반대하는 이들도 물론 있겠지. 설득하겠다. 어떻게 설득했고 어디에 무엇을 어떻게 설치했고 어떤 문제가 있었고 어떻게 해결했고 고양이들은 어떻게 적응했으며 예산은 얼마가 들었고 어떻게 지속가능하게 해야 하는지, 어떤 인력이 필요한지, 어떤 관리감독 체계가 필요한지, 이 일을 적용함에 있어 순기능과 역기능은 무엇이 있었는지 등등을 사계절은 관찰하고 연구해서 그 기록을 남기고 싶다. 딱 한 곳. 시범 도시 한 곳만 있으면 된다. 시작이 반이라고 했으니까. 그곳에서 실험적으로라도 시도해 보여주고 싶다. 가능하다는 걸. 공생할 수 있다는 걸. 그리고 결국은 다른 도시로 이 실험이 옮겨가는 모습을 꼭 보고 싶다. 그러다 어느 날 이 실험이 우리 생활의 표준이자 일상으로 자리 잡게 되기를 바란다.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에게도 이편이 좋다. 동물원 전부 없애고 동네에서 마주치는 동물들을 소중히 여기는 문화를 아이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옳은 방향의 미래다. 참새, 비둘기, 고양이, 강아지, 비 오는 날이면 만나는 지렁이, 달팽이, 여름의 매미 … 동물원이 꼭 필요한가? 이미 우리는 동물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데. 적어도 나는 아이를 데리고 동물원에 가는 길에 도로 위에서 로드킬 당한 동물들을 지나치는 운전자로 살아가고 싶지 않다.

  해결할 수 있는 것을 해결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고 그 외의 것은 신의 몫일 것이다. 이미 떠난 아이들의 안식은 우리의 몫이 될 수 없지만 아직 살아있는 생명들을 위해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나, 당신,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우연이다. 그 우연은 나를 위한 축복이 될 수는 있어도 다른 생명을 불운하게 만들 권리가 될 수는 없다. 나눠 쓰자. 죽이지 말자. 우리가 주인인 것처럼 굴지 말자. 이 나라가 정말 멋진 사람과 행복한 동물들이 함께 살아가는 멋진 땅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게 만들자. 우린 할 수 있다. 아마도(?)     


분명히 점점 더 나아지고 있다, 꿈을 꾸어도 좋다는 신호일 것이다

  2021년 10월 기준 우리는 어디까지 왔는지 살펴봤다. 친구는 영 안 될 일이라고 내게 허튼 꿈 꾸지 말랬지만 이런저런 소식들을 살펴보고 나니 아무래도 난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길고양이들을 잔인하게 학살하는 이들의 소식을 듣고 싶지 않아도 듣게 된다. 무력감과 분노... 그 괴로움을 말로 형용할 수 없기에 여기 적을 수조차 없다. 그런 소식을 듣는 날에는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 땅은 슬프고 절망적이고 소름 끼치는 일들로만 점철되어 있는 걸까, 세상은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걸까 싶은데 대국민팀플 원고를 쓰면서 조금은 웃을 수 있게 되었다. 내가 해내고 싶은 일들을 역시 해내고 싶어 하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도, 그들이 벌써 무언가를 해내고 있다는 사실도, 세상이 점점 더 나아지고 좋아지고 있다는 사실도 원고를 쓰면서 오히려 알게 된다. 세상을 조금 긍정하게 되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아주 오랜만의 일이다.

  서울시내 소공원과 근린공원에 길고양이 급식소를 설치할 수 있다는 서울시 동물보호조례 일부개정안이 통과되어 2021년 3월 25일부터 시행되고 있다. 서울의 공원은 소공원, 근린공원, 어린이공원까지 세 종류가 있는데 이 중 어린이공원을 제외한 모든 공원에 고양이 급식소를 설치할 법적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 이와 더불어 (법적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여러 지자체들이 주민센터, 경찰서, 소방서 등 공공기관 관내에 고양이 급식소를 설치하고 그 개수를 늘려가고 있기도 하다. 국가가 길 위의 동물들을 보호해야 할 필요성을 점차 깨닫고 변해가고 있다는 뜻이니 기쁘다. 이번의 조례 개정안은 아직 ‘해야 한다’가 아니라 ‘할 수 있다’에 그치지만 법적 보호 영역 안으로 길고양이와 길고양이를 돌보는 이들을 품은 것이다. 고무적인 발전이자 크게 내딛은 한 걸음이다. 조만간 ‘할 수 있다’에서 ‘해야 한다’로 바뀌기를, 서울시뿐만 아니라 모든 지자체가 이러한 조례안을 만들어 시행하게 되기를 바란다. 그 목표를 향해 계속 달려갈 이들에게 이만한 동력이 또 없을 것이다.

  서울시에서 가장 고양이 친화적인 곳은 강동구라고들 한다. 2013년에 이미 ‘동물복지 및 생명존중문화 조성 조례’를 만들었다(https://m.segye.com/view/20131218006657). ‘동물복지’라는 표현이 들어간 최초의 조례 제정이었다. 조례 제정 이전에 이미 시민들과 힘을 합쳐 길고양이 급식소를 운영한 바 있다. 길고양이 보호단체인 ‘미우캣보호협회’와 업무협약을 맺고 전국 최초로 길고양이 급식소를 설치했고 이런 시도들을 바탕으로 조례 제정에까지 이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긴 시간이 흘러 바야흐로 2021년에 서울시 전체 공원에 급식소를 설치할 수 있다는 조례가 만들어졌으니 이건 모두  긴 시간이 걸려도 포기하지 않은 시민들의 힘이다. 지난한 시간을 싸워온 이들에게 존경을 보낸다.

  다만 이제는 조금 더 그 시간을 단축할 수 있으면 좋겠다. 많은 시민이 함께 해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고양이한테 관심 없는데?” 라는 생각을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국민팀플에서 이 프로젝트를 열어 진행한다면 팀원들은 고양이를 좋아하거나 관심이 있기 때문에 모이는 것이 아니다. 이 땅을 같이 쓰는 입장에서 “지근거리에 굶어 죽어가고 차에 치여 죽어가는 생명이 있기를 바라지는 않아” 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마 이 팀의 일원이 될 것이다. 길고양이를 위해 당신이 무언가 하게 된다면 그건 생명을 어찌 대하는 땅에서 살아가고 싶은가, 에 대한 당신의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도 생명은 길 위에서 태어나고 길 위에서 죽어간다. 점점 더 나아지고는 있으나 더 빨리 완벽해져야 한다. 더 이상 누군가의 죽음 위를 달리고 싶지 않다. 누군가의 굶주림과 갈증을 외면해야 하는 밤산책도 괴로워 견딜 수가 없다. 그만 견디고 싶다. 바꾸어야겠다. 함께 해주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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