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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초록 Oct 23. 2021

9화. 재난, 나는 딱히 아는 것이 없다

대국민팀플: 재난에 대해 우리가 궁금한 모든 것

브런치북 9회 응모작

대국민팀플

9화. 재난, 나는 딱히 아는 것이 없다




가을이네재난대비시즌이구나?” 할 수 있도록

  오늘은 2021년 10월 19일. 오늘을 포함해 10월 12일부터 11월 30일까지 총 50일간이   2021 재난대응 안전한국훈련기간이다. 인터넷에 ‘재난대응’을 검색해보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이다. 재난대응 안전한국훈련은 재난 및 안전기본법 제35조에 따라 정부가 주관하는 범국가적 재난 대응체계 종합 점검 훈련으로 2005년부터 매년 실시해 벌써 17년째 진행 중이라고 한다. 정부 부처, 지자체, 소방, 경찰 등 일선의 재난대비 공공기관, 민간기업, 학교 등이 훈련을 실시하고, 그 과정에서 주로 참관의 형태에 그치기는 해도 시민들의 참여도 이뤄진다. 매년 훈련 기간이 끝나면 우수 훈련 기관을 선정해 포상도 하는 모양이다. (근데 난 몰랐음 … )

  재난대응 훈련을 받고 싶은 국민으로는 손에 꼽히는 열망을 가졌다고 자부하는데 (스터디카페에 완강기 어딨는지 찾아본 사람 나야 나) 스스로 정보를 구하려고 인터넷에 검색해보지 않으면 재난 대비 정보를 얻기 힘들다는 건 불만족스럽다. 아무리 한국이 IT 강국에 똑똑한 시민들을 두었다지만 하나하나 재난상황마다의 대처법을 검색하고 알아볼 만큼 다들 여유가 있었다면 아마 한국은 IT 강국도 아니고 뭣도 아니었을 거다. 그걸 찾아볼 여유가 없을 만큼 다들 정신없이 바쁘게 고강도의 노동을 해내고 있으니 우리가 이만큼 살지. 그뿐 아니라 인터넷 접근성이 좋지 않은 세대나 집단, 개인도 분명 많다. 뭐든 알아서 척척 잘하는 대한민국 사람들이라지만 재난대비 정보만큼은 앉은 자리에서 떠먹여주는구나 생각이 들 정도로 과하게, 또 과감하게 섬세해야 한다. 누구도 배제되어서는 안 되고 정보를 습득하는데 적극적인 사람과 상황, 소극적인 사람과 상황 별로 그 간극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 

  일단은 안전훈련만을 대상으로 생각해보아도 수정을 요하는 점들이 보인다. 대국민 안전훈련기간이고 시민들이 훈련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 훈련 참여 장소와 신청 방법 등을 문자로라도 발송해주어야 맞겠다. 더불어 시민들 전부가 단기간에 다 같이 물리적 참여를 할 수는 없으니 권역별 안전체험관을 안내하고 우리 동네 대피소는 어디 어디에 있고 각 상황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등을 적어 넣은 공보물을 받아볼 수 있도록 제작해 각 가구에 발송하는 정도는 해줘야 하는 거 아닐까? 그렇게 공보물이 날아오는 안전훈련기간에는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우리 아파트 전기 차단기는 세대 별로 어디에 있고 방화문은 어떻게 설치가 되어 있고 소화기는 언제 교체했고 우리 아파트에서 가장 가까운 옥외대피소는 어디고 옥상 문은 언제는 열려 있고 언제는 잠겨 있습니다”와 같은 안내사항들을 붙이고 이를 계기로 재난대비 현황을 확인하고 안전 점검도 싹 다시 한 번 하도록 관리사무소를 계도해 실제적으로 사람들이 일상 속의 재난대비 정보를 구체적으로 습득할 수 있게 하면 좋지 않을까? 

  이렇게 해서 시민들이 “아, 가을 이맘때는 재난대비 시즌이지?” 하고 피부로 느낄 수 있어야 진짜배기 아닌가. 17년이나 재난대비 훈련을 진행했다는데 대한민국 국민의 한 명인 나는 관련하여 아는 것이 딱히 없는 이 웃픈 상황이 단지 나의 학습 의지 부족으로 일어난 일인지 심도 깊은 판단이 필요해보여서 말이다.   


절대실전이 필요하지 않기를 바라지만

  지금 집으로 이사한 지 막 세 달이 되어 간다. 집은 그다지 넓지 않다. 눈길 닿을 곳은 이미 구석구석 다 닿았다는 말이다. 안방, 거실, 작은 방, 화장실 하나, 세탁기와 건조기, 보일러와 에어컨 실외기가 놓인 다용도실 하나, 그리고 현관이다. 이사 오던 날에는 집의 재난 대비 상황을 확인해보았다. 손상된 벽지를 제거하고 다시 도배를 해주던 기사님이 “이 집 벽지는 불에 안 타는 무연 벽지예요.” 하셔서 생각이 난 김에 둘러봤다. 현관에는 빨간색 양철 소화기가 하나 비치되어 있고 초록색 비상구 표시등이 현관문 위 남는 벽에 크게 붙어있었다. 소화기의 지시압력계 바늘은 녹색 부분에 얌전히 잘 있어 정상이었고(매달 한 번 눈금을 확인하라는 스티커도 붙어 있었다) 2019년 2월 제조된 것으로 2029년까지 사용연한이라는 것도 확인했다. 동생과 이런 대화를 나눈 기억도 난다. “집안에 저 비상구 표시등 있는 거 처음 보지 않아? 요즘 신축 건물들은 다 이런가? 신기하다.” 이삿짐을 풀어 내 개인 용품인 투척용 액상 형태의 소화기 네 개를 부엌과 거실 등에 비치하고 작은 손전등을 신발장 서랍에 넣어두고 나니 단촐한 재난대비 작업이 끝났다. 이게 이 집에 있는 전부라고 생각했다. 

  우리 건물에는 층마다 다섯 가구가 산다. 그중 어느 집의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최근 엘리베이터와 방화문 사이에 놓인 작은 플라스틱 상자 위에 누가 자꾸 먹고 난 요구르트 병과 빨대, 빨대 비닐을 살포시 투척하는 일이 며칠 내내 반복되고 있었다. 눈살을 찌푸리며 쳐다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저 박스 뭐지?” 했다. 손잡이를 잡고 슥 돌려보니 뒷면에 ‘완강기’라고 적혀 있었다. “완강기가 있구나?” 이사하고 두 달은 훌쩍 지나서야 엘리베이터 앞에 놓인 상자가 완강기 사용 장비라는 걸 깨달았다. 완강기 상자를 보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내리다기를 한 2주쯤 했을까. 어느 날 또 갑자기 “다섯 집인데 완강기가 하나야?” 했다. ‘이걸 이제야 궁금해 하는 거야?’ 이쯤 되니까 내가 약간 바보 같길래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긴 했는데 아무도 못 봤고 아무도 모르니까 괜찮았다. 

  분명히 궁금하고 이상하다고 생각해놓고 ‘뭐 다섯 집에 완강기 하나인가보지. 안전불감증 한국인 걸.’ 하면서 대충 잊어버리고 지내던 어느 날이었다. 세탁기를 돌리려고 다용도실에 들어갔다가 양말 한 짝을 세탁기와 실외기 사이로 빠뜨렸다. 양말을 꺼내려고 낑낑대다가 세탁기와 실외기 사이에 놓인 ‘작은 플라스틱 상자’에 엄지발가락을 부딪혔다. “어?” 세 발 뒤로 후퇴해서 눈 비비고 다시 봤다. 공용 복도 엘리베이터 앞에 놓인 그 상자. 그 완강기 상자랑 똑같은 상자가 거기 있었다. 당황한 채로 고개 들어 두리번거렸는데 두 번 고개 저을 것도 없이 한 눈에 완강기 로프 걸어서 내려가게 해주는 철제 지지대가 떡하니 창문 옆 벽에 설치되어 있었다. 인간의 시야가 이렇게 좁다. 분명 이사 오고 난 뒤 세 달 동안 다용도실에 서른 번은 들어왔을 텐데. 내가 가져다 놓은 짐도 아니고 세탁기도 실외기도 보일러 장비도 건조기도 아닌 무언가가 거기 떡하니 있었는데 아예 인식조차 못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누가 몰래 전날 가져다 놓은 거라고 우겨야 맞을 것 같다. 

  낑낑대며 완강기 지지대의 잠금장치를 풀어봤다. 간단하지만 처음엔 그냥 잡아당기면 펴지나? 하다가 버벅댔다. 나사도 빼야 하고 각도 맞춰야 하고… 만약 한 번도 이걸 직접 펴보지 않았는데 화재가 나서 탈출해야 한다면 무조건 헤맬 것 같았다. 철제로 되어 있으니 화재 시에는 열전도가 되어서 뜨거워 맨손으로 잡지 못할 것 같기도 해서 장갑이라도 근처에 가져다 놓으면 어떨까 싶기도 했다. 직접 만져보고 느껴보고 나서야 든 생각이었다. 이만큼 알았지만 아직 모르는 게 더 많았다. 직접 벨트를 몸에 걸어보지도 않았고 단단하게 잘 고정시키는 법도 모르고 더 중요한 건 완강기 지지대가 설치된 창문이 에어컨 실외기 열 빠지라고 설치하는 창문인데 그걸 어떻게 탈착하는지를 모르겠다는 거다. ‘유리 창문이면 망치로 깨면 되는데 이건 어떡하지?’ 싶었지만 물어볼 곳이 없어서 일단 무지한 채로 무기한 보류 상태다. 집안의 완강기 장치와 장비를 발견하고 나서 느끼는 바가 컸다. 한 줄로 적으면 이렇다. ‘아는 만큼 보이고, 직접 경험한 만큼 더 알게 되는 거구나. 모르는 게 너무 많아서 생존 확률 3%는 될지 모르겠다. 배워야 살겠구나.’      


안전체험관 방문 홍보하기재난가방 준비 캠페인하기 

  궁금한 모든 게 해결되진 않겠지만 급한 대로 재난 대비 기본교육 정도는 받고 싶어졌다. 1년에 한 번은 직접 방독면도 써보고 지하철 문도 수동으로 직접 개폐해보고 싶고 망치로 유리창도 깨보고 완강기 장치도 직접 몸에 걸고 낙하 훈련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해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됐다. 해보고 싶은 전부는 아니더라도 경험해볼 곳이 있는지 알아봤다. 규모와 체계를 갖춘 안전체험관, 재난체험관이 이미 전국 각지에 꽤 많이 들어서 있고 속속 개관을 앞둔 곳들도 있다는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제주, 무안(해상 특화), 광주, 부산, 울산, 전북 임실, 경남 합천, 경북 의성, 충북 청주와 진천, 충남 천안, 경기 오산(재난 특화, 식품 특화), 경기 안양과 이천(식품 특화), 안산(해양 특화), 경기 의왕, 인천(항공, 해상 포함 재난 특화), 인천 부평, 경기 구리, 서울 구로구, 서울 광진구, 서울 마포 소방서, 경기 파주 등이다. 

  몇 개만 적으려다 최대한의 목록을 직접 지도에서 찾아보고 그대로 옮겼다. 이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만이라도 꼭 체험관에 가보셨으면 좋겠는데 최대한 많이 적어놔야 거주지에서 그나마 가까운 곳을 하나라도 더 발견하실 것 같아서다. (남쪽지방부터 적어본 것은 개인적으로 서울을 기준으로 하는 일반적인 서술방식이 지루해서다. 별다른 뜻은 없다. 수도권을 기준점으로 삼지 않는 사고방식을 갖고 싶고 그런 노력을 자주 보고 싶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광나루안전체험관을 살펴보았는데, 총 4층 규모로 건물탈출, 화재대피, 소화기체험, 승강기체험, 방화셔터체험, 지하철체험, 태풍/지진체험, 전문응급처치 등을 배울 수 있다고 한다. 선박체험과 학생 재난 체험교실 등도 운영 중이다. 2020년부터는 코로나19 상황으로 인해 오프라인 체험은 불가능하고 온택트(비대면) 교육만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온택트 교육도 받고, 오프라인 교육이 다시 가능해지면 그때는 현장 체험도 해보기로 한다. 2020년 이전의 오프라인 방문 후기들을 보면 아이를 위한 체험으로 생각하고 데려갔다가 어른들이 훨씬 더 많이 배웠다는 얘기들, 한 번이 아니라 주기적으로 와서 다시 배우고 가야 한다는 의견들이 공통적으로 많이 적혀 있었다. 

  안전 체험관 면면을 살펴보다 보니 다채로운 장비들이 후기 사진들 속에 여럿 보였다. 늘 생각만 하고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고 있는 안전 용품 구비, 재난 가방 꾸리기도 이제는 시작해봐야겠다. 한 달 생활비의 5퍼센트를 재난 가방 꾸리기에 사용하는 걸로 결정했다. 몇 달에 걸쳐 천천히 하나씩 주문해 (몇 개월 걸리는 건가요) 완성해보겠다. 아예 이번 기회에 구비 목록을 정리하고 가야겠다. 전 국민에게 간단하게라도 재난 가방을 보급할 수 있으면 어떨까. 기본소득 얘기도 하는데 이 정도야 뭐… 가능하지 않을까? 아닌가. 일단 직접 꾸려보고 얼마가 드는지 확인해야겠다. 

  안 되면 펀딩으로라도 참여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먼저 보내는 걸로 일단 시작하고 펀딩 통 크게 100차까지 꾸준히 해나가면서 더 생각해보는 걸로. 대국민팀플은 행동주의를 기반으로 하니까 일단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시작을 하는 게 최고 가치이고 무기일 것이다. 어쨌든 이 프로젝트도 욕심이 난다. 다 안 된다면 재난 대비 책자 제작할 때 관련 내용이라도 상세히 적고 빈 가방에 비상식량 하나만 달랑 넣어서라도 일단은 보급하고 싶다. 하나씩 천천히 채워 넣으라고. 나는 관심을 가지고 몇 년 동안 생각했으면서도 미적거리면서 아직 실행에 옮기지 못했는데 딱히 관심 두지 않고 지냈던 사람들이라면 전 생애에 한 번도 재난가방을 꾸려놔야겠다는 생각을 못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지진이 잦은 포항 지역에서 재난가방을 주민들에게 배부했었던 게 기억나 포항 지진을 검색했더니 공교롭게도 바로 두 시간 전에 포항 해역에서 규모 2.2의 지진이 또 있었다고 한다. 재난은 어쩌면 공기처럼 우리 주변에 있다. 2017년 11월 포항에서 있었던 지진 이후로 포항시에서는 재난가방 천 개를 제작해 관내 주민들에게 배부한 바 있다. 재난라디오, 방재모자, 구급파우치, 랜턴, 보조배터리, 멀티툴, 핫팩, 생수, 호루라기, 마스크, 은박담요, 초코바 등 최소한의 생존대비 물품으로 구성했다고 한다. 

  다른 지자체들도 포항시 사례를 모델로 삼아 재난가방 보급을 검토하고 실행하기를 바란다. 정부가 나서 전 국민에게 보급한다면 이는 단지 1가구 1재난가방 소지의 의미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에게 상시 재난을 대비하고 경계하라는 경각심을 주고 재난 대비 의제에 대한 환기 효과를 불러올 것이다. 원전 밀집 지역인 부산 기장군에서는 지난 2016년 전체 주민 약 6만 2천여 명에게 ‘생명가방’을 배포할 것을 의논했으나 이유를 납득하기 어려운 의회 내부 힘겨루기로 인해 기장군의회에서 관련 예산을 전액 삭감하고 반대하고 나서면서 무로 돌아갔다고 한다. 시민을 최우선으로 두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세상사 소식만 들려오면 좋겠다.    

   

 ※개인적으로 재난가방에 넣어두고 싶은 목록은 다음과 같다. 

    방독면, 물, 물을 받을 물통, 통조림과 당류, 그 외 비상식량, 라이터, 맥가이버칼, 호루라기, 담요, 손전등, 라디오, 나침반, 무전기, 조명탄, 로프, 우비, 갈아입을 옷 한 벌과 모자,  항생제를 비롯한 비상약품, 산소캔, 일회용 렌즈 여분, 장갑, 여분의 현금, 여권(신분 증명 할 것), 완충한 보조배터리, 휴지 등. 고양이를 위한 것으로는 하네스 3개, 사료, 이동용 백팩이나 캐리어, 지퍼 잠금용 번호키 자물쇠, 배변 패드, 비상약, 여분의 비닐봉투, 넥카라, 프로필 카드와 사진, 작더라도 스테인리스로 된 밥그릇, 인식표 목걸이, 캐리어 고정용 박스테이프 등.      


반려동물 관련 재난 대응 매뉴얼 있을까요?

  탈레반 치하의 아프간에서 한 영국인이 탈출하려는 아프간인들, 자신과 함께 일하던 아프간인 직원들을 외면하고 자신이 운영하던 유기동물 보호소의 동물들만 항공기에 태워 피난한 것을 두고 세계적으로 논란이 일었다. 2012년 개봉작인 재난 영화 타워에서는 사람도 못 구하고 있어 괴로운 소방관들에게 반려동물을 구해달라고 한 부잣집 부부의 에피소드가 나온다. 우리 아이 구해달라고 울고불고 하길래 다른 사람 목숨 구할 인력으로 아이를 구하러 갔더니 강아지가 있었더라, 하는 서사였다. 강아지인 게 밝혀진 순간 관객들이 전부 욕을 한 마디씩 했다. 이런 상황을 볼 때마다 반려인으로서 고민하게 된다. 무엇을 옳다 해야 할지 망설이게 된다. 

  사람의 목숨이 더 중하고 타인의 희생으로 나의 반려동물을 구하는 선택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알고 있고 이해하지만 그래도 나에겐 나밖에 모르는, 내가 곧 세상 전부인 줄 아는 소중하고 연약한 가족이다. 나 스스로의 노력으로라도 지켜내고 싶은 것만큼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내 힘으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반려동물과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더더욱 재난 상황에 관심을 갖게 되고 민감해졌다. ‘재난 상황에는 사람 아이나 노인, 반려동물 등 약자와 함께일 때 생존확률이 훨씬 줄어들겠구나’ 생각하지만 그래서 생존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그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고 결론 내리게 된다. 나 살자고 가족을 버리지는 않지 않나. 아무리 상상해 봐도 그건 못하겠더라. 엄마가 이 글을 본다면 사흘을 꼼짝없이 등짝 스매싱 맞겠지만…

  얼마 전 알 수 없는 경보가 울려 온 동네를 뒤집어 놨다. 한 시간을 꼬박 울렸다.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는 밤이었다. 1분쯤 바깥을 살핀 후 경찰에게 신고하고 고양이를 데리고 1층으로 대피했다.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감지하면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는 건 십 대 때의 경험으로 얻은 깨달음이다. 중학교 2학년 때인가, 속초 설악산 밑으로 수학여행을 갔는데 그때 묵었던 숙소에서 야밤에 불이 나서 친구들과 전부 바깥으로 대피한 경험이 있다. 간판 전기선 합선 때문에 옥상에서부터 시작되었다던 불은 다행히 크게 번지지 않았다. 불이 위층에서부터 내려와 내가 묵었던 2층에는 대피하려고 문을 열었을 때 열기는 느껴지지 않았고 연기만 자욱한 정도였다. 지갑과 핸드폰을 챙겼고 겉옷도 입고 나왔다. 

  같은 방에 잘 나가는(?) 일진 친구들이 같이 배정되었는데 걔들이 한참 술을 먹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방은 아직 잘 수 있는 분위기가 전혀 아니어서 늦은 시간인데도 깨어있었던 덕에 빨리 나올 수 있었다. 그 애들에게 도움 받은 일도 있었다니, 지금 생각해보면 놀라운 일이다. 선생님들의 필사적으로 방문 두드리며 아이들 깨우는 소리, 이미 대피한 아이들 무리 속에서 핸드폰 빌려 부모님과 아직 찾지 못한 친구에게 전화해서 흐느껴 우는 소리, 방송국 기자들이 와서 카메라 삼각대 설치하고 웅성대는 소리, 미처 대피하지 못한 마지막 한 명이 창문을 열고 살려달라고 외치던 소리. 어젯밤처럼 기억이 난다. 그 깜깜했던 설악산 아래의 밤. 이후로 더 안전제일에 신경 쓰는 어른으로 자라게 되었다. 신고 정신이 투철한 것은 그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경험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 같다. 

  다시 비가 내리는 서울, 2021년 현재로 돌아오자. 경찰이 도착했고 여기저기 살폈다. 원인불명의 소리가 멈추는 듯했고 경찰들도 차를 타고 다시 돌아갔다. 거기까지 보고서 안심해 다시 고양이를 데리고 올라와 애를 풀어줬는데 갑자기 다시 소리가 더 크게 나기 시작했고 대형 소방차 세 대가 줄줄이 붉은 빛을 번쩍거리며 건물 앞에 줄지어 차를 대는 걸 봐버렸다. 겨우 진정한 고양이를 다시 억지로 붙잡아 캐리어에 집어넣느라 한참을 애원하면서 씨름하고 다시 1층으로 대피했다. 밖으로 나온 사람은 아까보다 좀 더 늘어 있었다. 그러나 전체 입주민의 수를 고려하면 많지 않았다. 

  나 한 몸이라면 위험이 임박했을 때 뛰쳐나와도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반려동물과 함께인 사람은 태평할 수가 없다. 특히 불안을 감지한 고양이는 강아지와 달리 사람 손이 닿지 않는 구석진 곳에 몸을 숨기고 나오려 하지 않기 때문에 남들과 같은 시점에 피하려 하면 이미 늦는다. 미리, 항상 미리 위험을 감지해야 한다. 지인의 고양이가 화재로 몇 해 전 생명을 잃었다. 지인은 세 번이나 불길과 연기 속으로 들어가 고양이를 찾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지인이 선물로 받은 고양이 물품들을 다시 우리 집에 선물로 주었을 때 ‘직접 쓰면 될 텐데 왜 날 챙겨주지?’라고 생각했는데, 한참 뒤에야 사연을 들었다. 울었고, 기도했고, 더욱 두려워졌다. 지진이든 수재든 화재든 일단은 반려인들에게는 반려동물을 데리고 대피하는 것부터가 엄청 큰 지상과제다. 

  작년 여름 (2020년) 호우가 심했다. 한강이 범람하고 도로가 통제되어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 반복적으로 연출됐다. 마트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15분 동안 비 때문에 앞이 안 보여 운전대를 쥔 손이 아플 정도로 긴장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어머니는 국민학생이었던 어린 시절 마을의 소가 떠내려가고 사람과 차가 쓸려나가고 동강이 범람한 대규모의 홍수를 경험하셨다고 그 해 여름 내게 말씀해주셨다. 그때 이후로 처음으로 그 시절의 수해를 떠올리며 몸서리칠 만큼 비가 내린다고. 어김없이 큰 비가 내리고 집 근처의 중랑천 수위가 올라가고 있다는 뉴스가 흘러나오는 밤이면 다 젖어도 좋은 슬리퍼를 신고 그 빗속을 걸어 자동차를 높은 지대로 옮겨 주차하고 돌아오곤 했다. 그리고 쿠팡에서 인간용 구명조끼와 고양이용 구명조끼를 샀다. 고양이용은 사람들이 며칠 새에 싹 쓸어가서 우리 고양이 뱃살(?) 사이즈가 안 맞는 것만 남아서 결국 반품했지만… 

  상상을 해봤는데, 아무리 캐리어나 이동가방에 애를 넣어 대피한다고 해도 물이 인간 허리, 가슴께까지 차오른 상태라면 고양이는 숨을 어떻게 쉬나. 몸에 부력을 둘러줘야 그나마 물에 뜨겠다 싶었다. 지금은 고층으로 이사를 왔지만 작년 호우 때는 1.5층 주택에 살았던 때였다. 비가 창문을 세차게 때리는 소리를 듣는 밤마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반려동물과의 재난 대피 상황을 상상하다 잠들었다. 반려동물과는 재난 대피소에도 들어갈 수 없다고 하던데… 누군가 무력으로 우리 차를 탈취하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서는 자동차에서라도 함께 지낼 수 있겠지만 그것도 아마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미안하고 슬프고 불안한 마음에 세상 모르고 잠든 고양이를 꼭 끌어안고 괜찮아, 괜찮아 하며 쓰다듬으면 물정 모르는 녀석은 그르릉 그르릉 소리를 내며 그저 좋아했다. 우리 고양이는 내가 저 때문에 그렇게 불안했다는 걸 알았을까?

  정부가 손을 놓고 있는 사이 사회적협동조합 우리동물병원생명에서 2016년 반려동물 재난위기 대비 매뉴얼 리플렛을 제작해 배포했다. 참고해 위의 재난가방에 준비할 물품을 대략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뿐이다. 정부의 적극적인 정책과 법적 근거 마련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반려동물과 함께인 가구는 자구책을 마련해 살아남아야 한다. 미국은 이미 재난 시 반려동물 대피 관련 법률이 2006년 하원을 통과했고 반려동물 동반 가능한 대피소를 마련하며 우리와는 반대로 반려동물을 데리고 대피하는 것이 시민의 의무로 규정되고 있다. 영국 역시 반려동물과 함께 사용할 수 있는 대피소가 마련된다. 일본도 대지진 이후 방재업무계획에 동물 관련 사항을 포함하고 사람과 반려동물 재해 대책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지자체들이 이를 참고해 자체 매뉴얼을 만들 수 있도록 독려했으며 반려동물과 동행하여 피난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대피소에서 사람과 함께 섞여 생활할 수는 없지만 대피소 한 구역에 반려동물들을 분리해 생활할 수 있게 하고 있다. 일본에는 반려동물을 위한 반려동물 구호본부에 재난 시 수의사가 상주해 반려동물 119도 운영된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아직 아무 것도 준비된 것이 없다. 2019년 4월 강원 고성 산불 재난 때 그 지역 동물 4만여 마리가 희생되었다고 한다. 이때를 기점으로 각지 각계에서 반려동물과의 재난대비 법령과 정책 마련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고성 산불 피해를 계기로 실제로 결실을 맺은 지자체 주도의 프로젝트가 있어 소개한다. 전주시 자원봉사센터의 박정석 센터장이 고성 산불 피해 현장에 직접 갔다가 처참한 상황을 보고 필요성을 느껴 반려동물 생존키트를 기획했고 그 해에 신설된 전주시의 동물보호과와 협업해 제작까지 이뤄냈다. 키트는 제작해서 보유하고 있다가 침수 피해가 컸던 2020년 구례의 반려동물 동반 시민들에게 처음으로 보급했다. 하나씩 해나가게 될 것이다. 대국민팀플 원고를 한 회차씩 써내려가면서 점차 깨닫는 것이 하나 있다면, 정말로 세상은 어떻게든 나아지고도 있다는 점이다. 누군가는 부단히 노력하고 움직이고 바삐 달리고 있다는 점이다. 더 나아질 세상을 위해서. 기쁘고 안심되고 손을 보태고 싶어지며 더 꿈을 꾸어도 괜찮다는, 초록불 신호등이 날 향해 밝게 오래도록 점멸하는 미래를 본다.        


재난대비 문답집 만들 수 있게 질문을 보내주세요

  에린 브로코비치 편만큼이나 길어질 줄이야… 끝이 보이지 않는 이번 회차를 드디어 마무리하는 마지막 주제에 접어들었다. 대국민팀플이 이 재난대비 의제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물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꿈을 꾸느냐에 따라 달렸겠지만 일단은 작은 것부터 하나씩 차근차근 해내고 몸집이 불어나고 영향력이 생겨 지자체들이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척이라도 해야겠다 싶어지는 그런 꿈만 같은 때가 온다면? 그럼 그때부터는 지자체와 면담 들어가는 게 주된 일일 것 같다. 지자체, 정부와의 협업이 재난 대비 의제에서는 거의 필수불가결이니 어쩔 수 없다. 근데 그만큼 영향력을 갖게 되는 때라는 건 우리 팀의 이데아 속에나 있고 현실에선 영영 오지 않는 순간일 수도 있으니 지금 하고 싶은 것, 현실적으로 해낼 수 있는 것부터 먼저 하자. 이것도 어렵다.   

  재난가방 펀딩 100차까지 하는 거, 완강기 발견 에피소드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모르는 걸 어디에 물어봐야 할지 모르겠는데 그거 좀 해결하는 거. 일단 이 두 개가 제일 해보고 싶다. 두 번째 건 매뉴얼 제작이라고들 생각할 수도 있는데 매뉴얼은 여기저기 산발적으로 이미 많다. 나는 디테일한 질문이 하고 싶다. 딱 그 상황에 맞닥뜨렸는데 매뉴얼 따라서 이것 저것 하다가 세부 상황에서 “어..?” 하면서 띵, 하는 수가 있다. 내가 완강기 지지대 옆 창문 탈착 못하는 것처럼. 매뉴얼에는 그런 세부적인 것들은 적혀 있지 않다. 각자 처한 상황이 너무 다르니까, 그것까지 다 망라할 수가 없는 거다. 완강기만 소재로 잡아도 각자 집 구조와 지지대 설치된 공간과 창문의 종류 등등이 다 얼마나 다르겠는가. 그것만 가지고도 책 한 권 충분히 나올 것 같다. 

  그러니 가능하다면 아주 구체적인 질문들을 시민들로부터 모아서 ‘현장의’ 진짜 전문가들께 부탁해 그 답을 찾아 책으로 만들 거다. 각자 궁금한 것이 비슷하면서도 또 다를 것이다. 그걸 다 모으면 재난백과 만들 수 있겠지? 여차 하면 시리즈로 낼 거다. 질문들을 마구마구, 많이 보내주셨으면 좋겠다. 그리고 책도 같이 만들어주셨으면(?) 더 좋겠다. 재난대응팀 우리끼리도 만들어보면 얼마나 멋진가. 왜 안 되겠는가. 다 같이 아주 천천히, 민간의 전문가가 되어볼 수도 있는 일 아니겠나. 바쁜 소방관분들이 직접오지 않더라도 우리가 우리 아이들 유치원, 초등학교에 무시로 가서 이것저것 가르쳐줄 수 있다면, 국민들이 그 정도까지 재난대비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고 훈련 받는다면 미래는 아주 약간 더 안온할 것이다.      


  ※추신

   인스타그램 콘텐츠들을 보면서 시간을 때우다가 셔터형 방화문 관련 게시물을 봤다. 방화문 셔터가 내려가 있으면 여기로는 못 나간다고 생각하고 다른 길을 찾아 헤매거나 이 앞에서 대피하지 못하고 사망하는 경우가 많은데 실은 형광색 띠로 표시된 부분을 밀고 나가면 셔터가 뚫리고 비상구로 나갈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실제 소방관분의 인터뷰를 따놓은 내용도 있었다. 이걸 몰라서 이 앞에서 죽은 사람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너무 아프다고. 나도 처음 알게 된 사실이어서 적잖이 충격이었다. 형광색 페인트나 테이프로 띠가 둘러져 있지 않더라도 어느 지점은 밀면 밀린다는 얘기일 것이고, 찾아보니 띠가 둘러져 있지 않을 때는 보통 셔터 중앙에 문이 위치하니 대략 그 지점을 열어보라고 한다. 그 간단한 사실이 제대로 정보 제공되지 않아 여태 사람들이 안전을 위해 설치한 방화벽 때문에 오히려 목숨을 잃었다는 건… 더 정확한 정보를 알아보기 위해 검색해보았더니 SBS가 2021년 7월 24일에 보도한 뉴스 리포트가 있었다. 인스타그램 게시물의 내용과 동일했고 그 외에 비상구가 없는 방화셔터의 경우 셔터로부터 3미터 이내에 별도의 방화문이 달려 있어 그 방화문을 열고 대피할 수 있다는 내용이 추가적으로 적혀 있었다. 

  다들 알아두시면 좋을 것 같고, 개인적으로는 이 게시물이 직접적인 계기였다. 1가구 1한국형 재난대비 큐앤에이집 만들고 싶다고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계기. 이 책을 만드는 일이야 시간과 노력이면 가능한 일이니 누가 만들어도 좋은데, 누가 만들었어도 나도 또 만들 거고 집요하고 꼼꼼하게 만들 거니까 따로 만드실 거면 차라리 연락 주셨으면 좋겠다. 같이 완벽하게 만들어보게. 그리고 팀플러들과는 책도 만들고 아카이빙 페이지도 만들고 싶다. 이 글 하나 쓰면서도 여기 저기 엄청 기웃거렸다. 행정안전부, 생존스쿨 페이지, 여러 단체 홈페이지와 블로그들, 기사들… 안전, 재난대비 관련해서는 여기 한 군데에서 정보 해결할 수 있어, 라고 생각할 만한 페이지를 만드는 게 궁극적으로 필요할 것 같다. 같이 해요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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