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집, [기억되지 않는 대화들]의 첫 번째 이야기
5. 헬멧
안내자는 그들에게 까만 안대를 건넸다. 입구의 불길한 문구가 채 잊히기도 전에 시야가 차단되었다. 귓가에 안내자의 발소리만이 울렸다. 딸각거리는 구두 소리를 따라 그들은 앞으로 나아갔다. 한 걸음, 한 걸음. 점점 더 차가워지는 공기. 서연의 손이 민준의 팔을 더욱 꼭 잡았다.
"안대를 벗으셔도 좋습니다."
안내자의 목소리와 함께 닫히는 문소리가 들렸다. 눈을 뜨자 그들은 할 말을 잃었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조금, 아니 아주 많이 리얼한 우주선 내부였다. 차가운 금속으로 된 벽면, 깜박이는 제어판의 불빛들, 그리고 창 밖으로 보이는 끝없는 우주의 풍경까지. 마치 실제 우주선에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한쪽 벽에는 낡디 낡은 우주복 두 벌이 걸려있었다. 그 옆에 붙은 쪽지에는 삐뚤빼뚤한 손글씨로 "입으세요"라고 적혀 있었다. 잉크가 번진 자국이 마치 눈물 자국처럼 보였다.
"와, 대박."
서연이 웃으며 우주복을 만져보았다.
"진짜 리얼하다. 이런 걸 어떻게 만들었지?"
처음엔 신기해하던 서연의 표정이 곧 찌푸려졌다.
"으, 근데 이상한 냄새나지 않아? 뭔가... 땀냄새 같기도 하고."
민준은 그녀의 허리에 살짝 손을 얹으며 우주복 쪽으로 이끌었다. 이런 친밀한 스킨십도 지금은 자연스러웠다. 공포 영화에서처럼, 무서운 상황은 연인을 가깝게 만드는 법이니까.
우주복을 입는 과정은 생각보다 복잡했다. 서로 도와가며 옷을 껴입는 동안, 민준은 이 상황이 마음에 들었다. 그녀의 허리를 잡아주고, 팔을 잡아주는 자연스러운 접촉들. 모든 게 계획대로였다.
하지만 헬맷을 쓸 차례가 되자 서연이 고개를 저었다.
"이건 좀... 헬맷까진 안 쓸래. 냄새나잖아. 이것까지 써야 돼?"
민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이건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그러게. 굳이 안 써도 되지 않을까? 어차피 게임일 뿐이잖아."
다음 방으로 가는 문 앞에서 그들은 멈춰 섰다. 희미한 비상등 불빛 아래, 붉은 얼룩이 묻은 벽면에 또 다른 문구가 보였다.
"모든 지시를 올바르게 따라주십시오. 이로 인한 불상사는 책임지지 않습니다."
둘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 정도 컨셉에 어디까지 맞춰줘야 하는 걸까. 민준이 먼저 고개를 저었다.
"너무 오버하는 거 아냐? 그냥 가자."
하지만 서연이 그의 팔을 잡았다. 그녀의 손이 차갑게 식어있었다.
"그래도... 쓰는 게 좋지 않을까? 뭔가 이상해."
찬 기운이 둘의 발목을 휘감는 듯했다. 민준은 짜증이 났다. 모든 게 완벽하게 흘러가는 것 같았는데, 이런 사소한 것에 걸리다니.
"시간 없어. 빨리 가자."
"잠깐만."
서연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냥... 헬멧 쓰고 가자. 왠지 불안해."
민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한 시간은 흐르고 있었고, 그의 계획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결국 그는 마지못해 헬맷을 집어 들었다. 투명한 헬멧 속으로 그들의 숨결이 하얗게 부서졌다.
이 모든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