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레이스 임은정 Oct 23. 2020

삶의 이유를 다시 생각하게 될 줄이야

누구를 위한 삶인가

"왜 살아?"


생각지 못한 질문에, 아무 대답도 못했다. 그동안 소중히 여겼던 것들을 다 포기하며 일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남에게 비친 내 모습은 그게 아니었나 보다. 애쓰고 또 애썼지만, 상대방의 기대치에는 늘 못 미쳤고, 그게 나를 미치게 했다. 앞으로의 삶은 남을 위해서 살아야겠다는 꿈을 꿨지만 그건 내가 가진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과대 포장된 내 꿈은 과자봉지 뜯으면 사라지는 질소처럼 사라졌다. 뜯어보니 별거 없던 나는 쉽게 찌그러졌다.




평일에는 학원에서 일하고 주말에는 사람들 고민 들어주는 일을 하고, 한 달에 한 번씩 비건 다이닝 프로그램을 하며 지냈다. 일요일에는 교회에 갔다.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던 아이들과의 관계도 친밀해졌고, 일도 적응되서 학부모님 대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학원에서 일한 지 2년 반이 되어 일에 익숙해졌을 때쯤, 학원 사정이 안 좋아지면서 폐업하게 됐다. 어떤 직장에 가든, 일을 오래 하지 못하고 내 발로 나오면서 그만뒀었는데 폐업해서 그만두는 건 처음이었다. 일하는 동안 아이들의 순수함과 귀여움에 늘 미소가 나왔고, 좋은 선생님들과 원장님 부부 덕분에 마음 편하게 일할 수 있었다. 학원에서 일했던 시간은 의미 있고 감격스러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학원을 그만두고 나니 평소에 관심 있던 분야에서 주도적으로 일해보고 싶었다. 그때는 채식에 관심이 쏠려 있었기 때문에 비건 요리를 매개로 사람들과 소통하며 사랑 전하는 일을 해보고 싶었다. 어떤 형태로 일을 풀어가야 할지 고민하던 차에 채식주의자들의 모임이 있다는 정보를 알게 됐다. 같은 관심사를 공유하는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고 싶어서 참석 했다. 거기서 비건 식당 창업을 계획하고 있는 한 언니를 만났다. 그 언니는 굉장히 사교적이고 추진력이 강한 사람이었다. 채식주의자 중 비건은 특히 외식할 곳이 적기 때문에 비건 식당이 하나라도 더 생기면 신나는 일이다. 그래서 응원하겠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함께 하게 됐다.


언니와의 두 번째 만남에서 각자의 목표를 이야기하고, 세 번째 만남에서 우리는 비건 식당 창업에 필요한 물품을 샀다. 언니가 알아봐 둔 장소가 있어서 바로 다음 날 가게를 열었다. 이 모든 일이 일주일 안에 벌어졌다. 머릿속에 생각을 정리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일이 흘러가고 있었다. 살면서 내가 주방에서 일하게 될 줄은 몰랐다. 정신 차려보니 어느새 나는 요리사가 되어 있었고, 내가 만든 음식을 누군가가 돈 주고 사 먹는다는 게 너무 신기하고 재밌었다. 체력이 부족해서 오랜 시간 서서 일하는 게 힘들었지만 즐거워서 버틸 수 있었다. 작은 공간에서 운영하는 식당이었기에 테이블 몇개에 손님을 받을 수 있었고, 소꿉놀이하듯 재밌게 일했다.


그러던 중 청년들에게 사업장 운영 기회를 주는 외식업 지원 사업이 있다는 정보를 알게 됐다. 더 넓고 좋은 시설을 갖춘 곳에서 일하고 싶어서 사업계획서를 써서 지원했다. 서류, 면접심사, 실기평가를 모두 합격하고 첫번째로 식당을 운영할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진짜 인생의 쓴맛이 시작됐다. 매일 새벽 5시 반 정도에 일어나서 서울로 출퇴근했다. 주 6일을 일하고 쉬는 날에는 매입과 매출 서류 정리와 다음 날 필요한 음식 준비를 해야 했다. 쉬는 날에도 제대로 쉬어본 적이 없다. 이렇게 열심히 살아 본 게 처음이었다. 누군가는 이렇게 고생하며 사회생활한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밥 먹는 시간 빼고 하루 평균 15시간 이상 계속 서서 일했다. 바쁠 때는 맨손으로 설거지해야 했고, 안전화를 신고 일하다 보니 발이 갑갑하고 불편했다. 피곤이 가시질 않았고 항상 출퇴근 길 버스에서 정신 못 차리고 잠을 잤다. 자다가 정류장을 놓친 적도 꽤 있다.


주방은 전쟁터라는 말을 실감했다. 거친 세계였다. 조금만 방심하면 손을 다치는 건 일상이었고, 불이 뜨거워도 참고 견뎌야 했다. 바닥이 미끄러웠기 때문에 넘어지지 않기 위해 항상 조심해야 했다.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바로 사고가 나는 곳이었다. 두 달 반을 빼곡히 일하면서 다리는 늘 부어있었고 보라색 핏줄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손에서는 껍질이 벗겨지고 지문이 없어지면서 어느샌가 스마트폰 지문 인식이 안 되기 시작했다. 칼에 베인 자국과 주름으로 거칠어진 손은 핸드크림을 발라도 소용이 없었다. 손톱에는 흰색 줄무늬가 생기면서 층층이 갈라지고 부서졌다. 온종일 통풍도 안 되는 안전화를 신고 일하다가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기절할 정도로 발 냄새가 지독했다. 발가락이 하얗게 변했다. 그제야 발 냄새로 고생하는 사람을 공감했고, 예전에 발에서 냄새난다고 놀렸던 친구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손님이 오시면 식사하다 말고 주방에 뛰어가서 일해야 했다. 늘 조마조마한 상태로 밥을 먹다 보니, 손님 없을 때 밥을 먹어 놔야 한다는 강박이 생겼다. 매일 폭식하면서 살이 많이 쪘다. 땀과 음식 냄새에 찌들고 초췌한 모습, 보라색 핏줄이 생기고 굵게 변한 다리, 어느새 주름지고 거칠게 변한 손, 관리 안 한 몸, 냄새나는 발을 보면서 내가 남자여도 나 같은 여자는 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로서의 인생은 이제 끝난 것 같았다.


점심시간이 되면 식당에 직장인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주문서가 쉴 새 없이 들어와서 끊임없이 삐-삐- 소리가 날 때면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았다. 정신없이 주문서를 꽂다가 더는 꽂을 자리가 없어지면, 뇌가 정지된 것처럼 아무 생각이 안들고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럴 때는 가만히 있지 말고 뭐라도 해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몸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후라이팬을 잡고 일을 하는 동시에 다음 일의 순서를 생각하는 게 무척 어려웠다. 이전에 주방일을 해본 경험도 없고, 손도 느리다보니 단체 손님 예약이 들어오면 그전부터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일이 바쁘고 정신없다보니 매일 성경 읽는 것도 벅찼다. 그동안 주변 사람들에게 기쁜 마음으로 날마다 성경 구절을 보내줬었는데, 삶이 힘겹다보니 그럴 여력이 없어서 그만뒀다. 주말에 일해야 해서 교회도 계속 못 갔다. 체력이 약한 것도 힘들었지만, 정신적으로도 힘들었기에 매일 살려 달라는 기도만 나왔다.


그간 엄마가 걱정하실까 봐 힘들다는 얘기를 못 했는데, 어느 날 힘든 거 있으면 얘기해보라고 하시는 엄마를 마주하니 눈물이 쏟아졌다. 털어놓고나니 시원하면서도, 걱정하시는 모습에 마음이 불편했다. 다음날 출근 준비를 하고 있는데, 친구분이 보내 주셨다며 엄마께서 찬송가를 틀어서 들려주셨다. 상담소 멤버들에게도 힘들다고 털어놨었는데 멤버 중 한 명이 지인에게 받은 성경 말씀을 보내주기도 하고, 상담소 대표님이 예수님 그림을 선물로 주기도 했다. 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기에 예상치 못한 뜨거운 감동이었다. 그 감동의힘으로 지원 사업 종료일까지 버틸 수 있었다.


같이 일했던 언니는 나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고생을 더 많이 했다. 언니의 고생을 덜어주고 싶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언니만큼 할 수가 없었다. 너무 힘드니까 남을 위해서 살겠다는 꿈은 진작에 사라졌고, 내가 당장 죽을 것 같으니까 남 생각이 안 났다. 겨우 하루하루 버티며 살아가던 어느 날, 언니가 업무를 더 해달라고 요청했다. 알겠다는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생각해보겠다고 했다. 섣불리 하겠다고 했다가 나중에 못 할까 봐 두려웠다. 내 말에 크게 실망한 언니가 왜 사냐고 물었을 때 멍해졌다.


내 한계를 넘어서며 일했는데도, 남에게 도움이 아니라 피해를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괴로웠고 미안했다. 왜 사냐는 말을 듣고 나서야 내가 도대체 왜 살고 있는지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 새 삶을 살게 된 이후로 내가 사는 이유는 남에게 사랑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일을 잘해서 상대방의 기대치를 충족시키면 사랑을 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람의 기대치라는 건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었고, 남의 평가는 내가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자주 혼나다보니 언제부턴가 기대치에 맞추려 애쓰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집중할 수 없었다. 그런다고 해서 사랑이 전해지는 것도 아니었다. 보는 사람마다 얼굴이 안 좋아 보인다며 걱정했다. 그렇게 몸과 마음의 건강을 잃어가고 있었다.


얼마 전 ADHD 자가진단 테스트를 해봤다. 20점 이상이면 ADHD가 의심된다고 하는데, 나는 48점이 나왔다. 그땐 그 일이 왜 그렇게 어려웠나 싶었는데 애초에 노력으로는 한계가 있던 거였다. 남이 할 수 있는 걸 내가 못할 수도 있는 건 당연한 건데, 그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노력하면 될 줄 알았는데 안 되니까 자책했다. 겉보기엔 멀쩡한데 남들이 일반적으로 해내는 일을 못 해내니, 그 언니도 얼마나 답답했을까 싶다. 나랑 일하며 고생 많았던 언니에게 정말 미안하게 생각한다.


식당에서 일하는 동안 힘들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돌아보니 힘들었던만큼 많이 배웠다. 지난 경험들 덕분에 좁았던 시야가 조금이나마 넓어진 것 같다. 삶의 이유를 다시 정립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또 많은 고난이 있겠지만 그럴 때마다 단단해지고 시야가 넓어진다면 넘어져도 금방 일어나리라 믿는다.




여러분 가운데 고난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기도하십시오. 즐거운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찬송하십시오.

야고보서 5:13 새 번역


anyone among you in trouble? Let them pray. Is anyone happy? Let them sing songs of praise.

James 5:13 NIV


이전 17화 크리스천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이 될 줄이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