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여행으로 수십 번은 간 도피처
나는 지난 5년간 광안리를 수십 번 갔다. 처음에는 몇 번 갔는지 셀 수 있었는데 이제는 셀 수 없을 정도이다. 삶에서 도망가고 싶을 때 광안리에 간다. 광안리가 도피처로 적합한 이유는 일단 숙박비가 싸다. 바다가 잘 보이는 전망인데도 1박에 싸면 6만 원, 보통 9만 9천 원이다. 두 번째는 밤에 혼자 돌아다녀도 안전하다. 광안대교의 야경이 유명해서 밤늦게까지 야경을 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뚜벅이로서 교통이 편리하다. 지하철과 버스가 모두 있어서 서면이나 해운대로 가기 편하다. 같은 바닷가여도 강릉이나 여수는 지하철이 없어서 뚜벅이인 나에게는 불편하다. 이런 현실적인 이유를 차치하고 광안리에 숨 쉬듯이 가는 이유는 윤슬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숙소 커튼을 걷으면 바다에서 곧장 들어오는 햇빛 때문에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눈이 부시다. 그런데 11시쯤 되면 눈을 뜰 수 있을 만큼 적당한 햇빛이 들어온다. 그때 하이얀 광안대교의 모습과 찬란하게 반짝거리는 바다의 윤슬을 보고 있으면 행복하다. 정말 황홀하다. ‘내가 이런 걸 누리려고 매일 매일 이 악물고 열심히 일했지.’라는 생각이 자연스레 든다. 그리고 다시 또 열심히 일할 에너지가 생긴다. 친구들과도 가족들과도 갔지만 혼자 많이 갔다. 여러 지역 중에 가장 혼자 여행을 많이 간 곳이 광안리다.
하도 광안리를 많이 가서 내 나름의 코스가 있다. 비행기를 타고 부산 공항에 도착한다. 그러면 지하철을 타고 서면역으로 간다. 보통 2박 3일 동안 부산에 있을 때 광안리에만 있으면 답답해서 첫날에는 서면에 간다. 항상 서면 교보문고에 가서 구경하고 저녁을 먹고 카페를 간다. 그리고는 숙소가 있는 광안리로 간다. 광안역에 내려서 광안리 바다 쪽으로 쭉 내려가다 보면 마트와 소품 가게들이 있다. 마트에 들려서 자기 전에 출출할 때 먹을 과일을 사고 소품 가게들을 구경한다. 광안리에는 소품 가게가 많다. 서울에 비해 부산이 물가가 저렴해서 소품 가게의 상품도 훨씬 싸다. 꼭 사지 않더라도 소품 가게마다 다른 분위기와 물건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숙소에 와서 짐을 풀고 광안대교의 야경을 바라 보면서 소파에 누워서 보고 싶었던 영화나 드라마를 맘껏 본다.
둘째 날, 광안리에는 아침 식당 맛집들이 많다. 콩나물국, 대구탕, 재첩 정식 식당이 있다. 든든하게 먹고 광안리 해변을 걷는다. 걷다 보면 오래된 아파트 단지에 다다르게 되는데, 거기에 수영구 의원들이 의전비를 가장 많이 쓴 빵집이 나온다. 쌀로만 빵을 만드는 곳인데 건강하면서 맛있기까지 하다. 빵을 사고 빵 봉지를 달랑달랑 흔들며 다시 바닷가를 걷는다. 걷다 보면 모래사장 위에 달팽이 집 모양의 구조물이 있다. 그 구조물 안으로 들어가면 부산 수영구청에서 엽서를 쓸 수 있도록 해 놓았다. 느린 엽서 서비스이다. 엽서를 쓰고 엽서함에 넣으면 1년 뒤에 엽서를 보내준다. 요즘 내가 드는 생각, 나에게 하는 다짐과 응원을 적어서 엽서함에 넣는다. 그리고 지하철을 타고 동백섬으로 간다.
동백섬은 섬의 둘레를 깎아서 산책로로 만든 공간이다. 관광지이기보다는 지역 주민들이 산책하는 곳이어서 여유롭게 산책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 묻혀서 음악을 들으면서 천천히 걸으면 기분이 한결 가벼워진다. 동백섬이 생각보다 산책 코스가 길어서 걷고 나오면 앉아서 쉬고 싶어진다. 그러면 항상 근처에 있는 스타벅스에 간다. 동백섬에서 가깝고 바로 앞에 버스 정류장이 있어서 다른 곳으로 가기에 편하다. 몇 년째 이 스타벅스에 갈 때마다 보는 신기한 풍경은 나이가 지긋하시고 여유로워 보이는 노년 분들이 많다는 것이다. 낮에 한가롭게 좋아하는 사람들과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하시는 모습을 보면 ‘우리 부모님도 노년에 저렇게 편하게 보내셨으면 좋겠다.’와 ‘나도 나이가 들었을 때 저렇게 여유롭게 살고 싶다.’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점심 겸 저녁을 먹으러 해운대에 간다. 동백섬과 해운대는 붙어 있어서 금방 간다. 자주 가는 식당은 스페인 음식점이다. 식당의 분위기가 정말 좋다. 스페인 느낌이 나는 화려한 벽타일과 활짝 열어 놓은 테라스, 재즈 음악까지. 음식이랑 와인 한 잔을 같이 시켜서 먹으면... 이곳이 낙원이다. 해가 지면 다시 광안리 숙소로 돌아 온다. 그리고 낙곱새를 배달시킨다. 언제부턴가 숙소에서 광안리 야경을 보면서 낙곱새를 먹는 게 하나의 루틴이 됐다.
여행의 마지막 날에는 돌아 다니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콩나물국, 대구탕, 재첩 정식 식당 중 한 곳을 가서 아침을 먹고 지하철 역으로 가는 길에 소품 가게를 괜히 한 번 더 들려보면서 아쉬움을 달래고 집으로 돌아 간다.
이렇게 내가 몇 년간 정한 코스대로 여행하고 나면 다시 일상과 부딪힐 힘이 난다. 내가 20대 초반에도, 중반
에도, 후반에도 광안리에 와서 다시 힘을 얻고 돌아 갔던 내 모습을 회상하며 ‘그때도 힘든 시기를 잘 지나 보냈듯이 이번에도 할 수 있어.’라는 든든함이 생긴다.